한국기행 (韓のくに紀行)
『韓のくに紀行』 이 책은 일본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1923~1996) 가 쓴 기행문으로 신라의 경주지역, 가야 지역, 부여 등을 여행하면서 쓴 소설같은 기행문이다.
시바료타로는 일본에서는 매우 인기 있는 작가인데, 일본제국주의의 역사교육(식민사관)을 받은 자가 한국사를 어떻게 왜곡하여 이해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책이며, 글로써 혹세무민하는 것이 그 나라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참고: 필자가 쓴 부여여행기 / 이석호(책 속 등장인물,백제사연구가).
시바료타로가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두 가지를 먼저 알아야한다. 그는 일제시대인 1923년에 태어났고 오사카외국어학교에서 몽고어를 전공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왜곡된 역사교육을 고스란히 받은 사람이다. 더우기 몽고어를 전공했다. 왜 몽고어일까?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 승리하며 한일합방(1910)을 이루고 만주사변(1931)에 의하여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제국주의가 몽고까지 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환경에서 시바료타로가 철저한 제국주의역사관에 물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즉 시바료타로는 왜곡된 역사인식의 소유자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한 후에 그의 글이나 말을 이해 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시바료타로의 글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한국의 학자들이 있다. 김병훈이 쓴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반디출판사)을 읽다보니 시바료타로를 교묘히 두둔하는 내용이 있다. 예를 들면 시바료타로의 한국비판을 나무라지 말고 그가 일본을 비판하기도 하므로 그런 자세를 배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방식은 잘못되었다. 시바료타로의 한국비판은 잘못된 역사인식에 비롯되었다는 것이 우선 문제이다. 그리고 그의 일본 비판은 일본인으로서 애정이 깃든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집 사정에 대해서 나는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이 우리집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나를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너나 잘해!라고 말할 줄 알아야한다.
같은 책에서 한일고대사에서 일본에 영향을 준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책들에 대에 마치 잘못된 국수주의 또는 수준낮은 생각으로 비판을 하는데, 이 또한 잘못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우리의 시각으로 봐야한다. 우리의 역사를 중국이나 일본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미 그것은 우리의 역사가 아닌것이다. 일본은 임나가야설 중국은 동북공정 등 없는 역사를 만들어서까지 한반도를 역사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는데,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당당히 말한 것에 대해 스스로 비난하는 셈인 것이다. 자기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이 마치 멋지고 수준높은 사람인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습성이 배어있다.
책에 대한 평가
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중에서
불세출의 사관 사마천에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 사내라는 필명을 가진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1923~1996)의 한국기행문집 <옛 조선남부 기행>(韓のくに紀行) 속엔 이런 대목이 있소.
“한국의 처지에서 말하면 황제란 우주에 단 한 사람뿐. 중국의 황제. 한국은 이왕가라 하듯 한 계급 밑의 왕. (…) 그 때문에 서울에 남겨진 이왕가의 궁전에 가서도 모양으로 보아 같은 상상의 동물인 봉황은 있어도 용은 없다.”
씨는 금방 이렇게 덧붙였소. “일부러 필자가 한국여행 중 서울의 옛 궁전을 배관했을 때 역시 봉황은 있어도 용의 모양은 없었다”라고. 앞 대목은 씨의 동양사에 대한 안목에서 나온 것이며 뒤엣 대목은 사료의 바탕 위에서 글쓰기에 임한 씨 나름의 성실성의 발로였을 터. 이런 대목에 접한 한국 독자층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법하지 않을까. 조금은 모자라지만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는 반응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씨가 좋아하는 퉁구스인스런 반응. 후자는 이렇게 대들 법하지요. “시바씨, 당신이 역사소설은 잘 쓰는지 모르나 조급하고 게다가 성실치 못하다”라고. “그대는 경복궁 근정전에도, 덕수궁 중화전에도 가보지 않았으니까. 거기 옥좌 위를 보시라.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이 덩그렇게 조각되어 있다”라고.
두루 아는바 조선의 정궁은 넷. 제일 오랜 것이 창경궁 명정전. 그 다음이 창덕궁 인정전. 이들 옥좌 위엔 쌍룡 대신 목각으로 조각된 새 두 마리가 매달려 있소. 이 새를 두고 씨는 봉황이라 했것다. 씨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조선조가 대한제국(1897)으로 변신하는 과정 속에 놓인 근정전과 명화전의 옥좌 위의 쌍룡도 볼 수 있었을 터. 이런 비판 앞에 씨는 어떤 몸짓을 보일까. 약간 이마를 찌푸리긴 해도 마음은 평화롭지 않았을까. 어째서? 씨의 안중에는 옛 고급문화의 나라 조선을 염두에 둔 기행이었기에 용 대신 봉황만 보였을 터. 이 기행문에서 제일 통쾌한 대목이라 하여 씨가 내세운 다음 장면이 그 증거. 경주 송림 여인들 춤마당에 카메라를 들이댄 일본 청년을 향해 30대 조선 신사가 성내어 호통치는 장면. 어째서 이 장면이 그토록 씨에게 통쾌무류였을까.
“성난 퉁구스인!”이 그 정답. 겉 다르고 속 다른, 혹은 신중하기 짝이 없는 종족들과는 엄청 다른 이것. 추측건대 한국기행이 풍물 감상도 예술 음미도 아닌 “일본의 선조 나라에 가기”였던 것이니까. 씨에게 퉁구스인의 한 사람으로 경의를 표하는 길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씨가 명정전이나 인정전에서 보았던 그 봉황에 대해 말을 조금 걸어보아도 되지 않을까. 그 새가 과연 봉황일까, 아니면 또다른 이름의 새일까. 일찍이 이 나라 문학판엔 이 문제가 제기된 바 있소.
“큰 나라 섬기던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의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조지훈, <봉황수> 부분) 이 시를 두고 시비를 건 것은 평론가 이원조. 왈, “아마 덕수궁 내의 중화전에 새겨 있는 악작(악작)을 봉황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라고. 이는 이원조의 작은 실수. 그렇다면 악작은 어떠할까. 위당 문하이자 국혼(國婚)까지 한 이원조의 지적이고 보면 봉황의 일종이긴 해도 악작이 좀더 전문적 견해였을까. 시바 씨가 살아 있었던들 이 과제에 동참해 봄 직하지 않았을까. 출처: 한겨레신문 (2008.4.4) ) .
비평: 글이 너무 횡설수설하고 있다.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써야지 책을 읽은 나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