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 신라에 정복돼 사라진 백제어

신라에 정복돼 사라진 백제어

말은 정치세력이 변하거나 문명이 새로 일어날 때 여러 어휘가 한꺼번에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한글 창제 때 이미 모든 어휘가 완성된 것처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말 표기법인 자음·모음이 완성된 것이지 어휘가 완성된 건 아니다. 이도(세종)가 만든 훈민정음은 언어학의 잣대로 볼 때 그 구조가 뛰어날 뿐 그 안에 담긴 소프트웨어인 당시 우리말은 미숙하기 짝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까지 누구 하나 우리말을 다듬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우리말 표기 능력이라곤 향찰(鄕札)이 전부일 만큼 우리말을 담는 데는 거의 쓸모가 없는 한문을 열심히 갈고닦아 조선인이 중국인보다 한문을 더 잘 쓰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기고, 우리말을 적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이런 의식은 500년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말이 언제 어떻게 생겨나고, 바뀌고, 없어졌는지 알아낼 길이 아득하다.

우리말이 겪은 변화 중 가장 이른 시기는 신라의 백제 강점기 같다. 그 이전에는 흉노, 투르크 등 북방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생겨나는 말이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겠지만 역사자료가 없어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다.

한반도 역사에서(만주를 비롯한 그 이북의 역사에서 우리말 흔적을 찾기 힘들다는 의미로) 우리말이 겪은 변화 중 최초의 사건은 아마도 신라어와 고구려·백제어의 충돌이었던 듯하다. 고구려·백제어는 비슷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은데, 아마도 이 시절에 고구려·백제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듯하다. 지금도 고구려·백제어의 원형을 찾으려면 일본어를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신라어와 고구려·백제어의 충돌은 바로 신라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한 시기에 일어났다. 신라 관리들이 점령지인 백제 땅에 파견되면서, 또는 신라인들이 점령지인 백제 땅에 들어오면서 백제어는 차츰 사라지고, 신라어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백제어로 표기되던 지명이 신라나 당나라식 지명으로 일제히 바뀐 것이다. 고랑부리라고 불리던 내 고향도 이때 청양(靑陽)으로 바뀌고, 가까운 노사지는 유성(儒城)으로 바뀌었다. 또 소부리, 고사부리, 미동부리, 모량부리 같은 순우리말 지명이 마치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하듯 일제히 한자 옷으로 갈아입었다.

재미있는 것은 신라어가 밀려들 때 바뀐 지명 중 거의 대다수가 중국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지도를 들여다보면 웬만한 우리나라 지명을 다 찾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미국 이주민들이 영국 지명을 따다 미대륙에 붙였듯이 백제가 중국대륙에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고, 신라가 사대 정신에 입각해 중국 지명을 우리나라에 갖다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기본 수사 중 ‘밀(密=3)’, ‘우츠(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 등의 백제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에는 일본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우리말에서는 사라졌다. 신라어가 밀려들면서 얼마나 많은 백제어가 사라졌을지 짐작할 만하다. 누군가는, 언젠가는 이때 사라진 백제어를 되살려내야만 한다.

출처: 신라에 정복돼 사라진 백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