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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민간인 학살

낙동강까지 밀렸던 미군과 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렸다. 9월 28일에는 서울 광화문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9월 29일 김포비행장에는 맥아더와 이승만이 도착했다. 국회의사당에서 중앙청까지 시가행진에 참여한 이승만은 서울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서울 시민들은 공산군 치하에서 빨갛게 물든, 사상이 불순할 가능성이 높은 의심스런 시민들이었다. 거짓말로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이승만은 서울 도착 후 시민들에게 엎드려 사죄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을 되찾은 뒤에 벌어진 일들은 부역자 처단 작업이었다. 친일 부역자 처단에는 그토록 우유부단했던 이승만 정권은 좌익 부역 혐의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9월 28일부터 강력한 부역자 검거 열풍이 불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심사를 맡았다. 각 시도 경찰국이 부역자에 대한 신고를 유도하는 등 부역자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다. 이런 부역자 검거 광풍은 곧바로 학살로 이어졌다. 학살은 불법이었고 그런 이유로 무자비했다. 부역 혐의자들은 억류 단계에서 이미 테러에 가까운 폭력적 고문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승만은 군사적 상황과 수형 시설 부족을 이유로 공산주의자와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재판과 처형을 신속히 집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제적 비난이 빗발치고 여론의 반발이 일어났다. 주미대사 무초가 나서서 이승만의 자중을 요청하는 등 진화에 나서야만 했다.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건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은 곤혹스런 일이었다.

1950년 12월 세계 언론은 유엔에 보고된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보도했다. 세계 언론들은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반(反)문명 행위로 고발했다. 이승만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돌발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는 독재자에 불과했다. 현재 북한 지도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다를 바 없었다.

유엔에 보고된 학살 사건은 당시 고양군 홍제리(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29여단 캠프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50년 12월 15일, 병사들이 포승줄에 묶인 재소자들을 트럭에서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렸다. 병사들은 마포 형무소 경비대 소속이었다. 39명의 재소자들 뒤에는 폭 1미터, 깊이 1.5미터의 구덩이가 4개 파여 있었다. 경비병은 재소자를 구덩이에 밀어넣은 뒤 소총을 난사했다. 경비병 수가 적었던 탓에 그들은 구덩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총을 쏘아댔다. 묶인 남녀는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김준연 법무장관의 발표에 의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되었지만, 사망자 중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두 명이 있었다고 영국군은 증언했다. 아마도 사살된 어른들의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확인 사살까지 진행된 학살이 끝난 뒤, 경비병들은 흙으로 구덩이를 덮고 옆에 새로운 구덩이를 팠다. 다음 날의 학살을 위한 것이었다. 보다 못한 영국군은, 다음 날 아침 35명의 재소자를 데리고 온 마포 형무소 경비병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빈 구덩이를 메우게 했다. 이어 사건을 유엔에 보고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캐나다군 화이트(White) 대령을 파견해 사건조사를 맡겼다. 학살 현장 주변 발굴 조사에서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학살은 계속됐다. 마포 형무소는 홍제리 학살터로의 죄수 이송을 중단했지만, 이번에는 육군 헌병이 좌익 혐의를 덮어쓴 죄수들을 데려다 총살형을 집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육군의 사형집행은 주로 경의선이 놓여있는 수색 총살장에서 이루어졌지만 이날 따라 홍제리 학살터가 선택되었다. 유엔 감시단의 시신 발굴 작업이 마무리된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긴급 출동한 영국군이 살육을 중단시켰지만 58명의 사형 집행 대상자 중 이미 20명이 학살된 뒤였다. 영국군 장교가 통역을 구하느라 지체된 시간 동안 죽은 숫자였다. 영국군은 한국군의 사형 집행 과정에 대해 잔인한 전쟁범죄라고 규탄했다. 사형 집행 병사들은 구덩이에 무릎 꿇린 사람들의 뒤통수에 대고 총을 쏘았다. 법률적 심사와 판결에 의한 형 집행이 아니었다. 보복과 응징이라는 적대적 분노의 발산일 뿐이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IS(이슬람 국가)의 참수 행태와 다를 바 없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영국군 29여단장 브로디(T. Brodie) 준장은 자신의 주둔지에서 학살 사건이 재발한다면 한국군과 형무소 경비대에 대한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어서 학살 현장에 영국군 중대 병력을 배치해 더 이상의 살육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서울 시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대통령(이승만)과 군의 발표만 믿고 있다가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남쪽으로 갈 수 없다는 소문이 퍼져 그나마 뒤늦게 피난을 떠나려 했던 사람들도 주저앉았다. 극히 일부지만, 시민들에게 약속한 서울 사수 국회 결의를 지키겠다며 남은 반공 인사들도 있었다. 이런 마당에 버리고 간 시민들 앞에 뒤늦게 나타난 정부는 사상의 순결을 증명하라고 다그침하고 있었다. 군과 경찰, 반공 청년 단체들이 총부리를 겨누며 적성분자들을 색출해 냈고 곳곳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이승만에게 한국전쟁은 천금 같은 도움이 됐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이승만은 곧 정권을 내놓아야 할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침공은 사면초가의 이승만을 살려놓았다. 전시비상계엄 상황에서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이승만에게, 전쟁은 한 줄기 빛이었다.

한국전쟁이 살려준 것은 이승만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살려준 것이 이승만뿐만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무부장관 애치슨은 '드디어 미국이 살게 되었다'며 환호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내리막길을 준비하던 미국의 군수산업체와 군부는 전쟁 산업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한국전쟁의 군수 지원기지가 됨으로써 2차세계대전의 상처에 연고를 듬뿍 발라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한가운데로 내몰린 남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고통은 반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한국전쟁이 현대사의 우여곡절 때문에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1951년 이후의 전쟁은 무의미했다. 휴전회담을 진행하는 상황인데, 38선 언저리에서 일진일퇴의 살육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북괴공산도당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거나, 미제의 괴뢰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는 수사는, 그 과정 속에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3년이나 계속됐던 한국전쟁은 동북아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판문점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된 후 우여곡절 끝에 타결된 휴전은, 대박을 노리며 판돈을 건 도박자들이 빈털터리가 되었다가 겨우 본전을 건졌다고 자위하는 꼴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을 잠시 중단하자는 정전협상은 불안정을 일상적인 체제로 두자는 것이었다. 이후 고착화된 남과 북, 동아시아의 긴장과 갈등 상태는 판문점체제가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휴전선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상징적인 국경선이었다. 무장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의 비무장지대는 군사력이 세계에서 가장 집중된 곳이 되었다. 이 휴전선 북쪽의 북한과 중국은 미국에 의한 정치적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남한은 적절한 무장력을 확보해 북한과의 군사적 균형을 갖춰야 했다. 일본의 재무장과 경제 재건 역시 판문점체제의 유산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전개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책임은 당연히 최고 통치자였던 김일성이 져야 했다. 그러나 민족의 태양급으로 절대화된 통치자는 무오류의 신이 되었다. 희생양이 필요했다.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혁명 동지들을 엉뚱한 혐의를 씌워 숙청했다. 스탈린이 남긴 유산의 상속자는 김일성이었다. 북한이 이상한 전제적 독재 왕국으로 진화하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중국은 경제 건설과 문화대혁명으로, 소련은 모든 분야에 대한 미국과의 경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몰락을 추구하는 적대세력이었다. 이런 사정은 북한의 고립을 더욱 재촉했다.

남한에서도 합리적 이성은 실종됐다. 크고 작은 권력은 부패한 자들이 나눠먹는 전리품이 됐다. 최고권력 아래로 피라미드처럼 단계를 이루어 이권을 나눠가졌다. 재벌과 언론, 학계를 망라한 카르텔이 남한의 독재체제를 튼튼하게 받쳤다. 이런 남한을 지배한 것은 반공이었다. 각종 협회나 단체는 반공을 맨 앞에 내세워야 했다. 그래야만 말단 행정기관에서 분배하는 떡고물인 보조금이나 지원금을 챙길 수 있었다. 반대파에 대한 공격은, 상대의 등에서 식은땀이 나도록 하는 "빨갱이" 한마디로 충분했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체제에서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조커 역시 반공이라는 카드였다. 반공이 강조될수록 시민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피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

일본에서도 군국주의를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1945년 패망 이후 전쟁의 광기를 지워야 했던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처방은 민주주의였다. 그냥 뭉뚱그려진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과거 전쟁으로 돌진했던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필요했다. 군부를 통제하고 권력을 심판할 수 있는 시민권이 확장된 체제, 노동조합과 노동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자본의 전횡이 공공적 질서에 의해 제어될 수 있는 그런 사회로 나아가야 했다. 그래야 주변국과 세계에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물꼬를 바꿨다. 미군정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를 이식받던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의 동북아 질서를 지키는 포스트가 됐다. 일본의 실질적 민주화는 중단되었다.

미군정청의 일본 점령 초기 정책은 분명했다. 일본이 두 번 다시 미국의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군사적 능력을 제거하고, 태평양전쟁에 대한 징벌적인 행위를 관철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런 미국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공산주의 확산의 방파제로 삼기 위해 미국은 일본의 역할을 재조정했다.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하고, 군사력을 강화시켜 미국의 안전 보장에 기여하도록 육성하는 것, 그것이 미국이 제시한 일본의 나아갈 길이었다. 일본이 미국에 절대종속을 유지하면서 자유주의 진영의 행동대원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미국이 원하는 일본이었다.

한국에서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했듯, 일본에서는 전후의 군국주의 유산이 깨끗하게 소멸되지 못했다. 반공이란 이름의 괴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냉전이란 진창에 처박아버린 결과였다.

몰락한 태평양전쟁의 주역들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쇼와시대의 요괴라 불린 기시 노부스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9월 11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 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미·소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일본의 태평양전쟁 책임은 잊힐 것이라 생각했다.

"냉전은 스가모에 있던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미·소관계가 악화되기만 하면 처형당하지 않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시 노부스케의 옥중서신에 들어있던 말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예측대로 냉전이 격화되자 전범들에 대한 심판은 힘을 잃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석방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전범과 전범기업은 부활하게 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해인 195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55년 출범한 자민당의 주축 세력이 된다. 결국 1957년 총리가 되는데 이로서 A급 전범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자가 전후 일본 최대 권력자가 되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것은 일본육사 출신 만주군 장교(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과거사의 실타래가 꼬이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이 만들 수밖에 없는 불투명한 여러 가지 것들은, 여름날 습기와 고온 속에 놓인 음식처럼 부패의 푸른 꽃을 피우게 된다. 슬그머니 전쟁 자본과 태평양전쟁의 주범이 복권된다. 자본주의는 속성상 정경유착을 바닥에 깔고 있다. 전쟁은 이런 자본과 권력의 결합을 더욱 촉진시키고, 그들은 더 큰 권력으로 진화한다. 일본이 과거사를 외면하고 평화헌법 무력화 시도를 하는 등, 우경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 전쟁통에 특수를 누려 성장한 자본과, 은근슬쩍 사면된 정치세력이 만들어낸 역사의 창조물이, 지금 일본의 자민당과 아베 총리 같은 전쟁 불사 세력들이다. 출처: 프레시안 (2015.4.26) /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