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 의자왕이 일본에 하사한 바둑판

바둑은 5000년이나 된 오래 된 것이기에 종종 옛 물건 들이 발견된다. 중국에선 2000여년 전인 후한(後漢) 때의 무덤에서 돌 바둑판이 발굴된 적이 있다. 일본엔 나무 바둑판으로는 가장 오래 된 목화자단기국이 있고 백제 의자왕이 일본 황실에 보낸 바둑통 은평탈합자와 홍감아발루기자라는 바둑돌이 있다. 1400년 전 만들어져 기막힌 예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는 이들 바둑돌과 바둑판은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상아’를 쓰고 있어 더욱 신비감을 준다.

의자왕이 일본에 보낸 바둑판 '목화자단기국'

의자왕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

최고의 예술품으로 격찬 받는 목화자단기국의 신비스런 자태. 1400년 된 이 바둑판은 스리랑카 산 자단에 상아로 줄을 긋고 옆 면엔 상아로 낙타나 공작 등 그림이 그려져 있어 실크로드 저 쪽에도 바둑이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짙게 불러 일으킨다. 백제 의자왕이 보냈다는 주장과 아니라는 주장이 맞선 채 아직도 모든 게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모두 어디 갔을까. 까마득한 삼국시대, 아니 훨씬 이전인 마한 때부터 한반도엔 바둑이 성행했고 고려와 조선 때는 더욱 인기를 끌어 궁중과 선비 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행세하는 양반 집에 바둑판 하나 없는 집은 없었다. 한데 그 많은 바둑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방에서 만들어진 명품 바둑알이 매년 수백 벌씩 한양으로 올라간 기록은 분명한데 그렇게 공 들여 깎았다는 천연 냇돌 바둑돌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일본 왕실의 보물이자 천하의 명품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과 바둑돌인 홍감아발루기자, 바둑통인 은평탈합자(銀枰脫合子) 얘기를 꺼내려 하니 먼저 한숨부터 나온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전국 경치 좋은 냇가 등에 산재한 석국(돌 바둑판) 말고는 옛날을 돌아볼 유품들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들 일본의 보물은 1400년 전 것이다. 더구나 이 중 홍감아발루기자와 은평탈합자는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보낸 것으로 금관 못지않게 호사스러워 바둑의 옛날과 바둑의 영화를 아련하게 보여준다. 최고의 예술품인 목화자단기국은 그 출처와 경로가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백제냐, 당나라냐, 또는 실크로드를 타고 건너온 아라비아 물건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 이 세 가지 물건은 한결같이 상아와 낙타·코끼리 등 남쪽 이역만리의 소재들로 구성돼 있다. 그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만약 목화자단기국의 비밀을 푼다면 바둑사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역시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보낸 바둑통인 은평탈합자. 겉 면에 코끼리 문양이 새겨져 상아 바둑돌과 함께 먼 아라비아나 인도 같은 남방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백제가 실크로드나 남방의 해상항로를 통해 많은 교역을 했음을 암시해 준다. 나라(奈良)의 일본 왕실은 서기 756년, 왕실의 보물 600여 점을 도다이지(東大寺)에 기증한다. 쇼무(聖武) 천황이 죽자 고묘(光明) 황후가 남편의 49재 때 물건 이름을 나열한 헌물장과 함께 기증한 것이다. 그 헌물장 중간 부분에 “의자왕이 붉은 옻칠을 한 느티나무 궤에 넣어 보냈다”는 설명과 함께 품목들이 적혀 있다. 서각(물소 뿔) 1구, 백서각 1매 등 당시 최고의 정력제로 이름 높았던 물소 뿔과 함께 바둑통인 ‘은평탈합자’ 4개와 바둑돌 두 벌을 보냈음을 기록하고 있다. 두 벌의 바둑돌은 모두 600개. 이 중 홍아발루기자와 감아발루기자는 상아로 만들어졌다. 흑기자, 백기자라 이름 붙은 또 다른 한 쌍은 백돌은 석영, 흑돌은 사문석으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홍아 132개, 감아 120개, 백기자 145개, 흑기자 119개 등 516개가 남아 있다.

홍아와 감아는 상아로 만든 바둑돌을 붉은색과 감색으로 염색하고 양 면에 꽃을 입에 물고 날아가는 꼬리 긴 새를 ‘발루(撥鏤)라는 기법으로 새겨 넣었다. 바둑돌 하나마다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 보통 정성이 아니다. 미술 평론가 유홍준씨는 “기발한 발상의 디자인에서 백제 공예의 난숙함이 유감 없이 드러난다”고 썼다.

바둑통엔 은으로 코끼리 그림을 새겼는데 평탈(枰脫)이란 기법을 썼기에 이름이 은평탈합자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백제에서 만든 공예품에 백제에서 나지 않는 상아를 쓰고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코끼리와 꼬리 긴 새를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백제는 정말 해상국가였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교역을 했던 것일까. 바둑은 그토록 귀한 소재들을 서슴없이 사용할 정도로 격조 높은 놀이였을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이런 의문은 현존하는 나무 바둑판 중 가장 오래된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에서 더욱 절정에 달한다. 목화자단기국은 스리랑카 원산의 ‘자단’으로 만들어졌다. 자단은 자줏빛이 도는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나무라서 140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상한 흔적이 없다. 바둑판 위의 361로는 상아를 새겨 넣어 그렸다. 바둑판 옆 면엔 낙타와 공작, 꽃과 식물, 과일을 쪼아먹는 새, 코끼리를 이용해 사자를 사냥하는 모습, 낙타를 부리는 인물 등이 빙 둘러 그려져 있다. 이들 그림은 상아를 써서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격조가 있어 단지 바둑판이 아닌 최상의 예술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 다른 특이점은 판 위의 화점이 9개가 아닌 17개라는 것, 그리고 바둑알을 넣는 여닫이가 두 개 달려 있는데 한쪽을 빼면 다른 쪽도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 바둑판은 어디서 만들어져 어떤 경로로 일본에 전해진 것일까.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중국(당나라)에서 만들어져 백제를 거쳐 건너간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라비아나 남쪽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져 실크로드와 당나라를 통해 일본에 전해진 것일까.

백제 의자왕이 일본 황실에 보낸 바둑돌 홍아발루기자와 감아발루기자. 상아를 깎아 붉은 색 물감과 감색 물감으로 염색해 만든 이 바둑돌엔 풀을 물고 날아가는 꼬리 긴 새가 300개 바둑돌마다 새겨져 있다. 앞서 언급한 헌물장에서 이 바둑판은 백제 의자왕이 보낸 품목과 함께 적혀 있지 않고 조금 떨어져 적혀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해석이 첨예하게 갈리게 됐다. 바둑돌과 바둑판은 한 세트로 함께 움직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 두 물건은 왜 떨어져 기록됐을까. 스리랑카 나무에 상아라는 소재, 아라비아나 인도를 연상시키는 그림들, 그리고 1400년 전이라는 시간은 바둑과 서역, 바둑과 아라비아 문명권이 전혀 무관한 관계가 아닐 것이라는 판타지 같은 상상마저 하게 만든다(실제 인도의 주로 편입된 시킴 왕국에선 바둑이 존재했고 지금도 두어진다).

목화자단기국을 오래 연구해 온 바둑서지학자 안영이씨는 그의 저서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한국바둑 2000년의 비밀』에서 이 바둑판이 백제에서 만들어졌고 의자왕이 일본에 보낸 바둑판이란 주장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결정적 증거로 17개 화점을 주목한다. “목화자단기국은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에서만 쓰는 17개의 화점이 그려져 있다. 순장바둑판이란 얘기다. 중국 황제의 선물이라면 중국이 사용하는 화점 5개의 바둑판을 민들 일이지 화점 17개의 바둑판을 만들겠는가. 화점 17개가 그려졌다는 것은 만들어진 장소가 한반도라는 근거가 된다. 백제에 낙타가 없었다는 주장도 오류다. 일본서기엔 백제가 낙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바둑알은 보통 180개가 필요하지만) 미리 포진을 하는 순장바둑에선 150개면 충분하다. 홍아, 감아가 각각 150개라는 것도 순장바둑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홍감아발루기자와 목화자단기국은 의자왕이 보낸 한 세트의 바둑판과 바둑알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바둑문화 연구에 진력해온 이승우씨는 자신의 저서 『바둑의 역사와 문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헌물장에서) 목화자단기국은 의자왕이 보낸 품목들 뒤로 17번째에 따로 적혀 있다. 적어도 의자왕이 보낸 물건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바둑판 재질이 남쪽 열대 지방의 것이고 낙타 등도 먼 곳의 동물이다. 옆 면의 그림에서도 서역이나 페르시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예 기법도 이와 유사한 다른 물건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백제 물건이란 점은 근거가 부족하다. 백제가 아닌 다른 코스, 즉 실크로드나 남쪽 항로, 또는 중국을 통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우씨는 또 “순장바둑은 영·정조 때 시작된 것이라고 김옥균이 밝히고 있다. 1400년 전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말한다. 중국에선 목화자단기국을 당나라 때 만들어진 바둑판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도 “바둑판 옆 면의 그림은 서역과 남방 교류가 왕성했던 당조의 문양”이라는 의견이 다수다.

그러나 일본 교토대 교수였던 오가와 다쿠지(小川琢治 1870~1941)는 “바둑판과 바둑돌이 한 세트라는 건 상식”이라며 목화자단기국도 의자왕이 보낸 물건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는 지질학자지만 바둑사 연구에 숱한 업적을 남긴 인물. 그의 아들 유카타 히데키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망했다. 의자왕은 그 무렵 위의 보물들을 일본 내대신 후지와라 가마타리(藤原鎌足)에게 보냈는데 가마타리는 임종 직전 자신을 찾아온 일왕에게 이런 말을 한다. “6년 전 백제의 백촌강 싸움에서 진 것은 나 혼자만의 판단착오였습니다. 백제를 멸망의 길로 내몰고 우리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 점 감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안영이-다시 쓰는 한국바둑사)

그러고 보니 새가 그려진 홍아, 감아에서 문득 망국의 슬픔이 묻어난다. 목화자단기국과 홍아, 감아가 의자왕이 쓰던 바둑판과 바둑돌이라면 그는 왜 이것들을 일본으로 보냈을까. 바둑판과 바둑돌에 똑같이 한반도에 없는 ‘상아’가 쓰인 것은 어떤 연유일까. 의자왕이 가마타리에게 보낸 보물들은 왕실을 거쳐 도다이지라는 절의 보물창고인 정창원에 보관되었고 그것들은 일제 때인 1940년 처음 공개되었다. 그 후 1993년에 두 번째 공개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그러나 목화자단기국에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역사의 흔적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출처: 지식클럽(2012.4.19)

나의 견해
1. 바둑통과 바둑알 그리고 바둑판이 의자왕이 보낸 것이라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은 연구자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2. 백제가 660년에 망했는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일본의 유력자 藤原鎌足에게 선물하는데 바둑알만 선물했을까? 그랬다면 백강전투에 지원군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 김옥균의 말이 선물받은 자 본인의 기록보다 우선 할 수는 없다. 먼저 김옥균이 순장바둑의 역사를 올바로 알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둑판과 바둑알은 의자왕이 일본에 있는 藤原鎌足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