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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

염석진은 친일파 이종형과 노덕술의 복합 캐릭터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역사학자 이준식 박사는 “천만 관객이 들고 이 중 1%만이라도 김원봉에 대해서, 그리고 반민특위에 대해서 찾아보고 배우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가 대부분 허구이지만 일제 밀정인 염석진이 해방 이후 반민특위 재판정에 나와 재판 받는 장면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옮겨온 것이다. 염석진 역의 이정재의 연기는 소름끼칠 정도로 압권이다. 염석진은 물론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준식 박사는 실존 친일파인 이종형과 노덕술의 캐릭터가 복합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밀정 이종형

이종형은 일제 밀정 혐의로 1949년 1월 10일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됐다. 박흥식에 이은 반민특위 2호 체포자다. 반민특위 기소장을 보면 “피고인 이종형은...약 5개월 간에 달하여 돈화, 동만 일대를 배회하면서 한인공산당원을 토벌한다는 구실 밑에 길림성 돈화현 왕도하 등 부락에 살고 있는 애국지사 50여 명을 체포하여 그중 17명을 교살 또는 투옥시켰고...” 이종형은 또 대표적인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을 밀고해 옥사케 한 혐의도 받았다. 안옥윤의 모델이 바로 남자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종형은 1949년 3월 29일 열린 반민법 위반 사건 공판에서 자신은 만주에서 공산당을 때려 부수고 민족운동의 체계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 재판소에 자신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무도한 짓이라고 강변했다. 심지어 그는 법정에서 반민특위 반대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스스로 자랑하기도 했다. 암살에서 염석진이 밀정 혐의를 부인하며 자신은 독립 투쟁을 했다고 열변을 토하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고문경찰 노덕술

영화 속 염석진에 녹아든 또 다른 캐릭터는 일제 때 고문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다. 암살에서 반민 특별재판정을 나와 제복 경찰관의 환대를 받는 염석진의 모습은 일제 밀정이었던 그가 해방 후 경찰의 고위 간부로 등용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제 경찰 노덕술도 건국 후 대한민국 국립경찰의 간부가 된다. 하지만 이종형, 노덕술과 염석진의 닮은꼴은 거기까지다. 영화에서 염석진은 16년 만에 김구의 밀명을 집행하는 안옥윤에 의해 처단된다. 반면 이종형은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석방돼 제2대 국회의원이 된다. 노덕술 역시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공소기각으로 풀려난 뒤 경찰에 복귀했다가 군에 들어가 헌병장교로 변신한다.

현실은 친일파가 독립투사를 암살

암살은 일제 조선군사령관과 친일 거두, 밀정을 처단하는 판타지를 통해 좌절된 역사를 뒤집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지만 영화의 미덕은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이를 통해 실제 역사를 알아내야 하는 관객들의 몫이다. 역사 속에서 실제 암살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들을 감싸는 권력에 의해 자행됐다.

1948년 말, 전 수도경찰청 총감 노덕술과 일단의 친일 경찰들이 친일 자본가인 박흥식의 자금으로 청부업자 백민태를 끌어들여 반민특위 요인들을 납치,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암살 대상엔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특별검찰관장 권승렬(당시 검찰총장),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등이 포함돼 있었다. 친일 경찰들은 백민태에게 실제 자금과 권총, 수류탄 등을 지급했다. 하지만 백민태의 폭로로 반민특위 요인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이처럼 당시 친일청산 및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의 회유, 협박, 테러가 끊이질 않았고 그 정점에 안두희의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 있었다.

김구 선생은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친일파와 반역자 청산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는 청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반민특위에 대한 위협은 계속됐고, 급기야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일어났다. 불과 20여일 뒤인 6월 29일에는 김구 선생이 흉탄에 쓰러졌다. 하수인은 안두희였지만 그 배후엔 장은산, 전봉덕, 김창룡 등의 친일파와 권력의 핵심이 있었다.

경찰의 습격이후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공소시효가 49년 8월말로 앞당겨졌고, 그해 10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가 해체됐다.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흔적 지우기는 집요하게 이어졌다. 전시인 1951년 2월 관련법들을 전부 폐지하고, 폐지된 법률에 따른 판결의 효력도 상실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반민법 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모두 복권됐고,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숙원이던 친일 숙청과 과거 청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 전인 1941년 11월 모두 3장으로 이뤄진 건국강령을 선포한 바 있다. 강령 제 3장 ‘건국’ 편에는 친일청산을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적에 부화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건국강령을 반대한 자와 정신이 결함된 자와 범죄판결을 받은 자는 선거와 피선거권이 없음... 부적자(附敵者 : 적에 아부한 자)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정신은 해방 후 제헌헌법 조문으로 이어졌고,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특위 출범으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1949년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의 협공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50년 이상 친일청산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이자 침묵과 망각의 대상이 돼 버렸다.

박정희의 딸 박근령의 망언

해방 70년을 열흘 앞둔 2015년 8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가 일본 인터넷 영상매체 ‘니코니코’의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이승만 대통령 재직 시 과거사 문제, 즉 친일문제를 처결했다는 발언을 했다. 박근령 씨는 A급 전범이자 과거 식민지배의 정점이었던 히로히토를 천황폐하라고 부르는 등 많은 망언을 쏟아냈는데, 특히 이승만 정권 때 친일청산이 마무리 된 것처럼 말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박 씨의 이 같은 발언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거나, 잘못된 역사를 배웠거나, 제대로 배웠어도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려 했거나, 셋 중의 하나에서 나왔을 것이다.

친일청산 실패와 친일파의 득세

전 대통령의 딸이자 현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는 이승만 정권 때 일제강점기라는 과거가 청산된 것처럼 말했지만 당시 반민특위의 성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1949년 상반기, 그 짧은 기간 동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 혐의자 688명을 조사해 그 중 599명을 특별검찰부에 송치했다. 이중 293명이 기소됐으나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이전에 선고된 사건은 41건에 그쳤다. 친일경찰 출신인 김덕기와 김태석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징역형은 13명(5명은 집유)이었으나 법 폐지와 효력 상실로 그나마 모두 없던 일이 됐고, 반민법 피의자들은 자유롭게 대한민국 거리를 활보하며 일제 때 보다 더 센 권력과 부를 누렸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리는 다른 나라의 1940년대 전후 처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다음은 해외 각국의 전후 과거사 처리 사례다.

다른 나라의 부역자 처벌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1940년 6월 독일에 점령당했던 프랑스는 1944년 8월 파리 해방 이후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초기엔 레지스탕스가 이른바 ‘거리의 정의’로 불린 즉결처분을 통해 부역자 등을 최고 만 명까지 처형했다. 드골 임시정부 합법 절차를 통해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1944년 6월 ‘협력자 재판소’와 ‘시민재판부’ 설치했다. 1948년 말까지 이들 재판소에서 모두 6,703명의 나치 협력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 중 767명이 처형됐다. 또 징역형과 시민권 박탈도 10만 명 수준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1990년대까지 과거사 청산 작업을 지속했다.

폴란드의 부역자 처벌

폴란드도 나치 협력자와 반역자 처벌을 위한 특별군사재판소를 설치해 3천여 건의 사형선고를 내렸고, 실제 2,500건 가량이 집행됐다. 1944년 8월 나치 치하에서 해방된 이후엔 반역자 등을 처벌하기 위한 통일적 법령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1946년부터 10년 동안 18,166건의 유죄가 선고됐고 이 중 사형은 1,212명, 무기형은 392명에 달했다.

네덜란드의 부역자 처벌

네덜란드는 해방 후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위해 1870년 폐지됐던 사형제도를 특별 형법을 통해 부활시켰다. 특별법원이 다룬 사건은 모두 14,562건인데 사형이 선고된 154건 중 39건이 실제 집행됐다. 무기징역은 148명, 나머지 징역형 등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경미한 사건은 별도의 인민재판소에서 다뤘는데 징역형 35,615건, 재산몰수 11,489건, 권리박탈 37,493건에 이르렀다.

중국의 친일파 처벌

중국 국민당 정권은 일본 패망 후 일제와 협력한 이른바 한간(漢奸: 중국에서 적과 내통한 사람을 이르던 말)을 처리하는 ‘한간처리안건조례’ 등의 특별법을 제정해 1945년부터 1947년 7월까지 국민당 관할 지역에서 모두 25,000여 건의 한간 사건을 처리했다. 그 중 369명이 사형, 979명이 무기징역, 13,570명이 유기징역을 받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도 관할 지역에서 인민재판 형태로 한간을 처벌했고, 그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어느덧 해방 70년이다. 사람들은 영화 ‘암살’을 통해 스크린 속에서나마 못다 이룬 친일파 청산의 아쉬움을 달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이미 세상을 떴다. 이제 정의와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과거청산을 넘어 과거를 극복하는 길은 올바른 기억과 교육, 그리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다. 출처: 뉴스타파(201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