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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철도 개통과 소사역

1899년에 개통한 경인선 철도는 인천역,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 우각역(지금의 제물포역 부근), 부평역, 소사역(지금의 부천역) 그리고, 오류역(옛부천군)과 노량진역까지 모두 7개역이었다. 그런데 왜 일제는 소사에 역을 세웠을까?

그때 부평평야는 풍요가 넘치는 곡창지대였다. 한없이 펼쳐진 김포평야와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중동과 상동일대에서 생산된 곡물을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서였다. 이뿐만 아니라 소사역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들을 수탈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이곳에 인위적으로 설치한 대표적 역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적 착취의 요충지로 삼기 위해 소사에 간이역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소사역은 부천군내의 고철을 수집하여 제련공장에서 무기로 만들어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착취해가는 역할도 했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구한말에 친일파 송병준이 중동에 '반전농림협동조합'을 세웠다던가, 역곡동 부근에 있었던 '일흥사'라는 제련소만 보더라도 대강 짐작이 가는 내용이다. 반전농장은 1936년, 일흥사는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옛 부천역(소사역)
▲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사진은 경인선 철도 개통 직후 촬영된 소사역(지금의 부천역) 전경.

허허벌판에 세워진 소사 간이역, 기차를 처음 본 마을 사람들은 무섭기도 하고 서머서먹하기도 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교통수단이었다. 시간이 차츰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뿐만아니라 근동에서도 모여들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역 주변은 국밥집도 생기고, 여인숙도 생기고, 구멍가게도 생겼다.

그 당시 소사역은 행정구역상 계남면 소사리였다. 그런데 소사역 때문에 계남이라는 이름 보다 소사라는 이름이 더 알려지기 시작했다. 계남이란 부평에 있는 계양산 남쪽이란 뜻으로 지도에도 없는 지명을 일제가 마음대로 만든 이름이었고, 소사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의 이름이었다. 일제는 1931년 계남면을 소사면으로 변경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부천군에는 또 하나의 교통수단인 자동차 4대, 인력거 7대, 짐차(손수레) 145대, 우(소)마차 666대가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경인간 처음으로 철도가 건설되었을 때 소사역이 지금의 부천역 자리가 아니라, 지금은 없어진 소사동 우시장 부근 (옛 낙원예식장)이었다. 옛 지도를 보면 찾을 수 있는데,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쉽다. 그때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차는 전동차로 변하여 오늘도 10여분 마다 부천 시민들의 애환을 실어 나르고 있다.

출처: 복사골부천 제 220호(2013.2) / 구자룡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