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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아버지 생신 즈음에 부모님과 계림가든에서 점심을 먹고 잠깐 시간이 남아서 강화 남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남문로7'이라는 카페를 보게 되었다. 몇 해 전에 백범 김구선생와 연관된 유적지 순례여행중 들렀던 곳이었는데 깔끔하게 카페로 변신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카페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고택도 있었으며, 카페 내부는 강화에도 이런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구나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운치 있는 카페였다. 이하는 주인으로부터 받은 마을소식지에 실린 내용이다.

백범 김구와 강화도 김주경

1895년 10월 조선 주재 일본 공사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살해 한 뒤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고 연못에 던졌다. 이 사건을 을비사면 혹은 민비시해사건이라 부른다.(김구 나이 20세).

대동강가 포구(치하포)의 여관에서 김구(1876~1949)가 조선옷으로 변장하고 칼을 찬 일본인 중위 쓰치다를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행으로 간주하고 발로 차고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石打木擊,以木連打]하여 죽였다.

그리고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는 국모보수(國母報讐)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란 포고문을 써서 길거리 벽에 붙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뒷날, 김창수는 김구로 개명). 3개월 뒤 김구는 집으로 들이닥친 순검들에게 쇠사슬로 동여져서 해주옥(獄)으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인천감리서로 옮겨졌다. (21세, 1896년).

사진(인천감리서 터): 인천시 중구 내동. 김구가 '치하포 사건'으로 복역하다 탈출한 곳이다. 오른쪽 아래 안내판이 서 있다.

강화도의 김주경, 교도소의 김구를 찾아가다

옥중생활에서의 김구의 의연한 태도와 언행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흠모하게 하였고, 강화도의 김주경(金周卿)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김주경은 전 재산을 바쳐가며 김구의 석방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엿다. 어느 날 감옥소를 찾은 그가 김구에게 옷 한 벌과 함께 시 한편을 내 밀었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물고기가 아니리 (拔扈豈常鱗)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求忠必於孝)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請看依閭人)

탈옥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김구는 감사의 표시와 함께 '한 때 구차스럽게 살기위해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순 없으니 과히 우려하지 말라'는 답장을 보냈고, 여러 생각 끝에 쇠창을 이용하여 감옥소내의 장기수 몇 명과 함께 감옥을 탈옥하였다. 인천 감옥생활 1년 8개월 만이었다.(23세. 1898년3월)

걸인 행색으로 간신히 서울로 온 김구는 곧 삼남지방으로 도피행각 겸 방랑길에 나선다. 한 때는 공주 마곡사에서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고 승려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가을 부모를 만나 환속한다. 어느 날 '문득 강화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김두래(金斗來)라 이름을 고치고 강화성의 남문 안 김주경의 집을 찾았다. (25세. 1900년 2월)

탈옥수 김구, 강화도의 김주경을 찾으러 오다

김구가 애타게 찾는 김주경은 그 집에 없었다. 그 집에 살고 있던 동생 김진경의 말에 의하면 김주경은 집을 나간 지 3,4년이 되었으나 소식 한 장 없고, 집안은 망할 대로 망해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김구는 그 집 사랑방에서 세 달 동안 김주경의 7세 아들(김윤태)을 비롯해 30여 명의 아동들에게 '동몽선습', '사략', '천자'를 심혈을 다해 가르쳤다. 이 때 김구는 김주경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자신을 감옥에서 구해내기위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과 김주경은 이를 위해 가산까지 모두 탕진한 후 나중에는 피신까지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후 김구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여러 가지 교육활동을 하는 중 김주경이 강화를 떠난 뒤 10여 년 동안 붓 행상을 하여 거금을 벌었으나 객사하였고, 그의 동생 김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 하였다는 말을 듣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만세운동에 참여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상해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44세).

중국에서의 임시정부시절에도 김구는 국내 소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김주경의 유족을 탐문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소식은 얻지 못하였다.

김구, 다시 강화도의 김주경 집을 찾다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김포공항 땅을 밟은 김구는 서울 경교장에 짐을 푼 즉시 윤봉길, 이봉창, 김주경의 후손을 찾는 신문 보도를 냈다. 얼마 되지 않아 윤봉길의 자제와 이봉창의 질녀는 만났다. 하지만 김주경의 아들 김윤태는 이북에 있어 오지 못하고, 그 친딸과 친척 등만 강화, 김포에서 찾아와 '기쁜 마음과 슬픈 마음으로' 서로 만났다. (70세. 1945년 11월)

이후 김구는 전국 지방순회에 나서 인천을 시작으로 전국 각처를 다니다 다시 한 번 강화도의 김주경 집을 찾는다. '옛 날 그댈 있는 그 집'을 방문하여 환영하는 친척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합일학교운동장에서 환영식에 참석, 강연을 하였다. (71세. 1946년 11월)

사진: 1946년 11월 다시 강화도를 찾은 김구가 김주경의 집에서 찍은 기념사진. 이 집 대들보에 '1928년 7월 14일'이란 글자가 있어 '1928 가옥'이라고도 불린다.

Cafe 남문로7 (전화: 032-933-9300
주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남문안길 7번지)
이미지 출처: http://coable.tistory.com/37

김주경이 살던 집('1928 가옥') 한쪽이 카페(이름: 남문로7)로 사용되고 있다. 차 한 잔 주문하고 두 사람을 생각한다. 무엇이 나이 '마흔 쯤'된 김주경으로 하여금 얼굴 한 번 본적 없고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십대 초반 김구를 위해 '가산 전부를 팔고' 집안 몰락에, 결국은 객사까지 이르게 하였나? 그리고 원래 탈옥을 생각 않던 김구가 김주경과의 만남을 계기로 감옥소 담장을 넘고, 이후 평생 그를 잊지 않게 한 것은 무었이었나? 두 사람의 인연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거린다.

출처: 마을이야기 8호. 발행처: 우리마을연구소. 발행인: 김경준. 연락처: 010-2518-0248. 이메일: kdolmen@hanmail.net.편집디자인: 디자인센터산(032-424-0775)

강화의 '의혈남아' 김주경이 김구의 구명운동 나서

우선 김주경은 서울로 가서 당시 법부대신 한규설(韓圭卨)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한규설 대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감이 책임 있게 김창수(김구)의 충의를 표창하고, 조속히 방면하도록 하여야 옳지 않겠소? 폐하께 비밀히 주청이라도 하여 장래에 허다한 충의지사가 생기도록 함이 대감의 직책이 아니겠소?” 이에 한규설도 속으로는 그 말에 경복(敬服)하였습니다. 김주경이 지당한 얘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규설은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벌써 이 사건, 즉 ‘치하포사건’이 국제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조정 대신들 중에서 이 사건을 고종황제에게 아뢸 경우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그에게 불이익을 줄 흉계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규설로서도 옳은 일인 줄은 알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규설의 이같은 말을 들은 김주경은 분기탱천하여 대관들에게 욕을 퍼붓고 나왔다고 합니다.

김주경의 백범 구명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용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 일단 공문서로 접수시키기로 하고 법부에 공식적으로 소장(訴狀)을 제출하였습니다. 마침내 법부에서 답변이 왔는데 그 내용은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한 말의 뜻은 가상하나, 사건이 중대하여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는 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 번 세 번에 걸쳐 각 관청에 소장을 올렸으나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룬 채 어는 곳 하나 명쾌한 답변을 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7, 8개월에 걸쳐 구명운동을 하다 보니 김주경의 주머니가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김주경은 경제적 때문에 할 수 없이 소송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백범과는 피붙이도 아닌 그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로서도 몹시 답답하고 분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주경이 백범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보통 위문편지였는데 그 안에 시조 한 수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시조의 내용을 소개하면,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拔扈豈常鱗)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나니 (求忠必於孝)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請看依閭人)

이 시조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에게 '탈옥'을 권유한 내용입니다. 즉, 조롱을 박차고 나오라거나 그물을 떨치고 나오라거나, 또는 충(忠)에 앞서 효(孝)가 먼저라고 한 대목 등이 그것입니다. 백범은 이 시조를 읽고서 즉시 김주경에게 답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그간 자신을 위해 백방으로 마음 써 준 것은 감사하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구차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니 너무 우려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백범은 예전과 같이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감옥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김주경의 구명 노력은 계속 되었습니다. 김주경은 심지어 관용선(官用船) 한 척을 탈취하여 해적질을 할 준비까지 하였는데,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급기야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백범의 부친은 그간의 소송 문서를 챙겨 당대의 유명한 문인 이건창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건창 역시 탄식만 할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출처: 보림재, http://m.blog.ohmynews.com/jeongwh59/243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