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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목포 여행기

호남고속철도(KTX) 개통에 따라 서울에서 목포까지 2시간대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침 일찍 서두르면 당일치기 여행도 거뜬해 보였다. 그렇게 기대 반, 의심 반의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목포는 1897년 10월 고종의 칙령으로 개항된 도시다.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개항을 강요당한 부산항이나 인천항과는 성격이 다르다. 목포항은 ‘자주적’ 개항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열강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국제 관계에 얽매여 있었다. 결국 목포항은 일제의 주도로 개발이 이뤄졌다. 그리고 일본은 목포항 개항과 거의 동시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각국공동거류지를 입맛대로 조성하는 등 목포를 야금야금 장악했다.그 후로 100년이 넘게 흘렀지만, 목포에는 당시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목포 당일치기 여행코스

목포역→유달산→목포근대역사관 1관(구 일본영사관)·일제강점기 방공호·옛 목포부청 서고·국도 1·2호선 기점 기념비→이훈동 정원→유달초등학교(구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목포근대역사관 2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카페 행복이 가득한 집(구 나상수 가옥)→오거리문화센터(구 동본원사 목포별원)→목포역

목포여행의 시작, 유달산

유달산 마당바위에서 내려다 본 목포시내

목포역에서 내려 유달산으로 먼저 길을 잡았다. 역에서 유달산 정문 격에 해당하는 노적봉까지는 걸어서 15분.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마치 군량미처럼 보이도록 해 왜군들의 사기를 꺾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래는 유달산과 한줄기였으나 일제가 목포의 기를 끊기 위해 도로를 내는 바람에 지금은 안타깝게 둘로 나뉘어 있다.

노적봉을 등지고 유달산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228m의 유달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어찌 보면 동네 뒷산처럼 아늑하고 부담이 없다. 일부 숨이 헐떡거리는 구간도 있지만, 왕복 1시간 반이면 충분해 가볍게 다녀오기 좋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시작으로 한때 화약을 넣고 포를 쏴 정오를 알려주던 오포대와 ‘목포의 눈물’을 노래한 가수 이난영의 노래비, 그리고 몇 개의 정자를 지나면 마당바위에 닿는다. 유달산에 지어진 정자는 모두 5개. 보는 곳마다 느낌이 달라 빼놓지 않고 들를만하다. 그중 목포 시가지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유선각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 쓴 현판이 있어 더 유명하다.

마당바위는 관운각 위에 있다. 어른 열 명이 앉아 쉴 정도로 넓은 바위라 하여 마당바위라 불린다. 바위에 서면 바다 쪽으로 고하도와 목포대교가 어우러진 풍경이 보이고, 반대쪽으로 목포 시내가 펼쳐진다. 바로 앞에는 유달산 최고봉인 일등바위가 있다. 울뚝불뚝 기암괴석이 하늘로 솟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일등바위 아래 암벽엔 일본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새긴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이 있다. 일본인들은 유달산 일대에 88개의 불상을 설치하고 순례하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이곳 유달산 정상에만 거의 유일하게 남았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장에서 생긴 흉터처럼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다.

씁쓸한 기분을 추스르고 일등바위에 올랐다. 탁 트인 공간에 들어앉은 목포시가지와 다도해의 풍광이 두 눈 가득 펼쳐진다. 조용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에 불편했던 심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일등바위를 혼자 두고 내려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 (구 일본영사관)

목포근대역사관 1관 (구 일본영사관)

유달산에서 내려와 노적봉 바로 아래 언덕에 자리한 옛 일본영사관으로 갔다. 1900년 12월 완공한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다. 일본영사관에 이어 목포이사청, 목포부청 등으로 활용되다, 광복 이후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었고,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은 멀리서도 한눈에 딱 들어온다. 외벽 곳곳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욱일기 문양이 박혀 있다. 내부로 들어서자 2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보인다. 마치 잘 꾸며진 세트장에 온 듯한 느낌이다.

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됐다. 방마다 마련된 전시공간에는 애환이 담긴 유물과 자료 1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1930년대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이 사용한 토지 측량기를 비롯해 당시 부유층들이 썼던 축음기, 나무냉장고 등이 눈길을 붙잡는다. 1940년대 목포오거리의 모습을 재현한 축소 모형과 일본인이 사용하던 벽난로, 거울도 보인다. 벽난로는 원래 총 9개가 설치돼 있었는데 현재는 2곳만 남았고 나머지 일곱은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건물 뒤편엔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에 대비해 만든 방공호가 자리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굴을 파는데 강제 동원된 목포 주민들의 모습이 재현돼 있어 당시의 비참한 상황이 느껴진다. 방공호 왼쪽에는 옛 목포부청 서고가 눈길을 끈다. 목포근대역사관 건물이 목포부청으로 활용될 당시 건립된 것으로,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의 전시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로 활용 중이다.

호남 최대의 일본식 정원, 이훈동 정원

이훈동 정원

옛 목포부청 서고까지 둘러본 다음 이훈동 정원으로 향했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에서는 걸어서 5분 거리다. 근대역사관 앞 돌계단을 내려와 정원으로 가려는데 왼쪽에 커다란 기념비가 하나 보인다. 한때 이곳이 신의주까지 달리던 국도 1호선과 부산으로 이어지는 국도 2호선의 기점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념비다. 비석을 등지고 200여 m쯤 가면 오른쪽 골목 안에 이훈동 정원이 있다. 1930년대 일본인이 지은 집을 광복 후 해남 출신 국회의원이 소유했다가 1950년대 당시 조선내화 창업자인 이훈동이 사들여 꾸몄다고 한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졌다.

정원을 둘러보려면 먼저 정원 옆에 있는 성옥기념관에 들러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의 호를 딴 성옥기념관은 이훈동 선생의 88세 생일, 즉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해 선생의 자녀들이 건립한 문화공간이다. 안에는 이훈동과 그의 자녀들이 모은 근·현대 예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성옥기념관을 스윽 둘러보고 이훈동 정원으로 갔다. 정원은 소문처럼 아름다웠고, 예상보다 훨씬 컸다. 세월을 덧입은 석등과 석탑이 113여 종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운치가 느껴진다. 본래 일본풍의 정원에는 꽃이 없는데 이훈동 선생이 훗날 정원을 다듬으면서 동백나무, 벚나무 등을 곳곳에 심었다고 한다.

정원은 입구정원과 안뜰정원, 임천(林泉)정원, 후원 등으로 꾸며졌다. 자그마한 연못을 끼고 있는 임천정원에서 집 뒤쪽을 올려다보니 유달산 오르는 길에 만난 첫 번째 누각 ‘대학루’가 눈에 들어온다. 연못 둘레를 한 바퀴 둘러보고 후원으로 향했다. 이훈동 회장의 흉상이 세워진 너른 잔디밭이 마치 작은 공원 같다. 발아래로는 목포의 옛 도심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유달산과 옛 일본영사관, 이훈동 정원을 지나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오후 2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에 미리 끊어둔 서울행 기차 시간은 저녁 6시 50분. 4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옛 심상소학교와 목포근대역사관 2관, 구 나상수 가옥, 오거리문화센터까지 둘러봐야했기에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최승희가 춤추고 한국호랑이가 지키는, 유달초등학교(구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

유달초등학교 (구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

이훈동 정원에서 나와 이번엔 길 건너 오른쪽에 자리한 유달초등학교로 들어갔다. 일제의 교육기관이었던 옛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을 보기 위해서였다.

강당은 1929년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됐다. 완공 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개관 기념 공연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들었으나 한국인 입장은 철저히 막았다고 한다. 지금은 책걸상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유달초등학교엔 옛 심상소학교 강당 말고 또 하나 볼거리가 있는데 다름 아닌 한국호랑이다.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잡힌 한국호랑이를 당시 일본인이 사들여 박제로 만든 다음 기증한 것이다. 호랑이는 옛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 옆 건물, 교무실 앞 복도에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목포근대역사관 2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유달초등학교 맞은편 골목으로 발길을 돌려 목포근대역사관 2관에 도착했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은 1921년 세워진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대표적 경제수탈기관으로 교통 요충지인 목포와 부산·이리·대전·대구·원산·평양·사리원 등지에 지점이 설치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곳 목포지점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둬들이기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1·2층 모두 일제강점기 시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 자료로 채워져 있다. 대부분 목포의 옛 모습과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그중 몇몇은 너무나도 잔혹하여 경고 문구가 따로 붙어 있을 정도다.

1층 계단 옆에는 당시에 쓰던 대형 금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육중한 철문 뒤에 자리한 커다란 방은 한때 모두 금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광복 뒤에는 해군 헌병대의 유치장으로도 사용됐다.

계단 뒤엔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의 ‘八紘一宇(팔굉일우)’가 새겨진 돌기둥이 있다. 1940년 당시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쓰고 세운 탑이다. 최근 한 초등학교 운동장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견돼 옮겨왔다고 한다.

2층에는 조선왕조 최후의 모습과 빼앗긴 조국, 침략자 일본, 일제의 아시아 침략 등을 테마로 한 사진이 배치돼 있었다. 전시물을 쭉 훑어보다 건물 밖으로 서둘러 나왔다. 사진으로 적나라하게 남겨진 아픈 역사를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겉도 속도 잿빛인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 포근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구 나상수 가옥

어디로 갈까 지도를 뒤적이는데 때마침 대각선으로 마주 보이는 집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일본식 기와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산가옥이 분명했다. 담벼락에 달린 간판을 확인해보니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내부가 궁금하기도 하고, 잠시 쉬었다 가고 싶기도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작은 마당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조를 훼손하지 않고 카페로 개조한 공간엔 과거와 현재가 아름답게 교차하고 있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차 한 잔을 시켰다. 중앙 테이블에는 출출한 나그네들을 위한 샐러드며 빵, 잼 등이 준비돼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룬 맛이 아니었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였다. 켜켜이 쌓인 시간을 그대로 담은 창에서는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름처럼 행복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인 거주지에 남은 일본식 사찰, 오거리문화센터(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오거리문화센터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그렇게 한동안 카페에 앉아 공간이 주는 따스함을 온전히 즐겼다. 창밖에는 어느새 늦은 오후 햇빛이 노랗게 내려오고 있었다. 서둘러 나와 오거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거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거주지와 한국인 거주지의 경계지역이었다. 오거리 동남쪽 유달동·대의동·중앙동·서산동·만호동 일대에는 일본 사람들이 기거했고, 오거리 북서쪽 만호진이나 북교·죽교동 등 유달산 기슭에는 반대로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오거리문화센터를 목적지로 정하고 천천히 걸었다. 옛 화신백화점(김영자 화실), 갑자옥 모자점을 비롯한 크고 작은 일본식 건물이 발길 닿는 골목마다 박제된 유물처럼 남아 있었다. 어떤 건물은 문짝이 뜯기고 기와가 무너진 채 방치되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건물은 간판을 바꿔 달고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오거리를 지나 오거리문화센터에 도착했다. 옛 동본원사 (※ 일본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는 절로 일본어로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라고 한다) 목포별원 건물로 일본 특유의 크고 경사가 급한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인 주거지역에 세워진 일본식 사찰이라는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포교를 위해서였다니 어쩐지 좀 씁쓸했다. 건물은 광복 후 목포중앙교회가 인수해 최근까지 교회로 쓰이기도 했다. 불교 사찰이 교회 건물로 바뀐 점이 흥미로웠다.

어느덧 해가 지고 오거리 일대에 조명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목포청년회관, 북교초등학교, 양동교회 등 옛 목포 사람들의 또 다른 흔적을 지척에 두고 여정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꼭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온금동 다순구미마을도 다음을 기약했다.

※ 출처: 청사초롱 457호 (20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