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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 연구가 이석호

『국파산하 이석시 독류강월기영휴 낙화암반 화유재 풍우당년 미진취』 (나라가 망한 산하는 그 옛날과 다른데 흘러가는 강물속에 홀로 머물러있는 저 달은 몇번이나 차고 졌던가.낙화암반의 꽃들은 아직도 건재하니 비바람이 몰아친 그해에도 미처다 불어 날리질 못하였구나). 옛 백제의 얼과 문화를 남달리 아끼는 이석호(李夕湖) 부여문화원장이 늘 애송하는 부소산고란사에 걸려있는 한 묵객의 시다. 그는 이 시를 탁본해 자신의 서재에 걸어놓고 향토사학 연구의 정열을 채찍질 한다.

부여 부소산밑 옛 백제왕궁터 한 모서리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그의 한옥은 보기드문 사설 「백제박물관」 이다. 서재를 겸한 진열실에는 30년동안 수집해 온 2백여종 1천여점의 갖가지 연화문이 새겨진 백제기와편과 2백여점의 백제 토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돼있다. 책장에는 한일 두 나라에서 출판된 수백권의 백제연구 서적과 옛 문헌들이 꽂혀있고…. 서재 마루에는 20여년째 모아온 60여종의 동양난들이 군자의 풍모를 다투어 자랑하고 있다.이원장의 백제기와 컬렉션은 이제 백제문화연구의 중요한 보고이기도 하다.

『이제 백제문화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보람을 느낍니다. 일본의 고대사학자들이 자주 찾아오고 「가나야마」 전주한대사가 이끄는 한일문화교류단도 한국에 올 때마다 강연을 요청해와요』이원장의 백제탐구는 일본사학계의 고대사연구 붐이 최근 고조되면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그는 전문사학자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스스로가「향토사학자」 라고만 불러주면 다시없는 「영광」 이라고 겸손해한다. 그러나 그가 일본에 알려진 것은 어느 유명한 한국 역사학자도 따르기 어려울 지경이다.대표적인 예의 하나는 그의 저서 '百済は語る'. 일본 「통일일보」 에 연재한 그의 백제사연구가 1984년(講談社) 가을 책으로 출판되자 삽시간에 베스트셀러가돼 지난해말 3판을 냈다.

그는 또 일본의 유수한 월간지· 역사잡지· 일간신문 등에도 백제문화에 관한 논문과 단편적인 글들을 지금까지 30여편이나 기고했다. 물론 국내 주간신문·잡지등에도 기고를 했지만 일본쪽의 기고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의 백제문화연구가 한일 두나라에서 새삼 각광을 받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학술적인 체계화를 갖추는데 크게 기여할만한 많은 고고학적 유물과 문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지금도 일본초청 강연을 가면 받는 강사료를 한푼도 쓰지않고 모아서 골동품가게를 뒤져 백제기와는 물론 고구려·신라기와까지도 사온다. 둘째는 부여·공주 호산등지의 백제문화권 발굴과 답사로 풍부한 현장체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열기를 뿜고있는 일본의 고대사연구 붐이 4∼7세기의 일본 고대사는 당시의 고구려·백제·신라 한반도 삼국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고 특히 백제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원장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의 대학과 각종 연구모임등의 백제문화 초청 강연으로 아주 분주하다. 강연 횟수가 한달 평균 5∼6회씩이다. 이원장의 백제연구는 어떻게 보면 운명적인 인연이기도 하다. 그는 1927년 백제신사·백제사·왕인묘가 있는「일본의 백제」 히라까따시 (장방)에서 출생했다.

원래 충남 공주가 고향인데 부친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난속에서 장갑도 끼어보지못한채 국민학교를 다녔다. 국민학교 1학년때 어느 남한 일본인 여자 금우로부터「조센진」 (조선인) 이라는 날카로운 쏘아붙임을 당했다. 소년은 그말이 가난과 볼품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만 알고 넘어갔는데 얼마후 부모님 심부름을 하다가 그말이 한국인을 멸시하는 욕임을 알았다. 그는 내심 조선인임을 부끄러워하기도 했는데 중학교 1학년때 역사선생이 『일본불교는 구다라 (백제) 에서 들어왔고 오늘의 일본문화원류는 백제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역사시간이 끝나자 다짜고짜 일본인 급우에게『나는 구다라진(백제인)』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는 것이다. 백제인의 통쾌한 승리감을 맛본 후 여름방학중 경도도서관을 들러 백제관계 책들을·뒤져보면서 백제를 더욱 알려고 노력했다.

2차대전중 경도에서 팔녀공전 전시과를 졸업했다. 해방을 맞자 백제생각이 더욱 채찍질돼 누님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친 채 귀국, 고향인 공주에 자리를 잡았다. 6· 25동란을 맞아 부산 기장으로 피난을 갔다 경주를 거쳐 공주에 다시 돌아왔다가 본격적인 백제연구를 해볼 생각을 굳히고 59년 부여로 이사했다. 학교를 일본에서 다녀 한일 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것도 그의 백제연구가 일본에서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간접적인 원인중의 하나다. 백제문화연구 자체가 국내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 거의 황무지 상태였던 30여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온 이원장의 백제연구는 오늘의 국내외 백제문화연구 붐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셈이다. 아직도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72년)을 계기로 한 고고학적 접근정도가 고작인 백제문화의 연구는 한일 고대사의 보다 명확한 구명을 위해서도 폭넓은 연구를 서둘러야할 역사· 고 고학계의 급선무가 아닐 수 없다. 출처: 중앙일보 (1986.3.19)

작성: 2015.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