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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정희에 대한 역사왜곡 현장

청운각의 유래

이곳 청운각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그해 4월 이곳 문경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시어, 1940년 (까지) 2년 9개월간 거처하셨던 곳이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교편을 잡으셨던 무렵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이르렀으며, 한민족 말살정책은 교육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역사는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을 때다.

그러나 민족정신이 남달리 강한 박정희 교사는 여러 제자들을 밤에 놀러오게 한 다음 " 우리는 한민족(조선사람)이다. 우리글,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 (→ 박정희의 혈서로 판단한다면 이 부분은 거짓이다. )

" 하시면서 단군 후손의 뿌리를 일러주셨으며, 문화민족임을 강조하셨고,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과, 일장기에 태극선을 그리시여 민족혼을 일깨워 주시다가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엄청난 수난을 겪다가 급기야 집단폭행 등 대충돌로 천직으로 알았던 교직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이 학교에 머물던 2년 9개월 동안에 두번이나 군관학교에 입할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고 박정희의 혈서는 만주신문에 보도 되었다. )

그 때 눈물과 공포에 쌓여 있는 우리 제자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 선생으로는 그놈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총칼을 차고와서 이겨주마 ...... " 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쟁쟁하다. (→ 박정희는 총칼을 차고 일본군이 아닌 독립군을 잡으러 다녔다. )

이와 같은 결과가 만주로 피신케 된 동기가 되었고 군생활이 시작되는 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가난 속에 어렵게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배고픔도 면하고 대접도 받을 수 있는 그 때의 그 좋은 교사직에 연연치 않고 조선인으로서는 극히 위험한 행동을 연속적으로 하셨던 것이다. (→ 피신한 것이 아니라 혈서까지 써가며 지원한 것이다. )

몇몇 제자들도 일본인 교사로부터 매도 많이 맞았던 그 현장이 바로 이곳 청운각인 것이다. 그후 군시절이나 대통령 재임시에 10여 차례 못잊어 찾아 오시다가 1978년 11월 24일 마지막 오셔 가지고는 파란 많은 생애를 국민의 비통속에 그 많은 치적을 남기신채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셨다.사심없고, 굳은 의지와 철학을 가진 민족주의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

이곳 청운각은 교사에서 군인으로, 그로인한 후일의 대통령으로서 .... 숙명적 가난을 물리치고 국력신장의 기틀을 마련하시고 비운의 생을 마치게 된 근원적인 장소이기에 .... 우리들은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흘러갈 것이다. 수 천년 수 만년 우리의 역사 속에 " 우리의 스승인 박정희 대통령은 사심없이 오직 구국위윈의 일념으로 일하셨다" 고 기록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곳 청운각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런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파이다. )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협조를 바라면서 ..... 서기 1986년 7월 1일 청운각 보존관리위원회 (제자들의 자원단체 )

청운각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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