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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서도면 주문도 교회 이야기

교동과 석모도

강화까지 갔다가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안의 섬'이 교동 말고도 여러 개가 있다. 교동 바로 아래 석모도는 보문사로 유명한 섬인데, 가난한 어부가 그물에 걸리 아기 돌부처 22개를 모신 뒤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로, 지금도 사업가 부인이나 입시생 부모들이 자주 찾아, 석모도로 가는 외포리 항구는 언제나 붐빈다.

본래 이 섬은 송가도, 석모도, 매음도, 어유정도 등 네 섬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간척사업을 해서 하나로 연결했다. 그래서 지금은 교동보다 더 큰 섬이 되었다. 석모도에도 송가, 석모, 항포, 석포 등 네 곳에 교회가 있으나 불교의 위세에 눌려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역사 유적으로 남은 것도 별로 없다.

대신 석모도 서남방에 자리한 주문도(注文島) 사정은 다르다. 이곳에서 교동 못지않은 선교의 역사와 그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섬에서 강화 본도의 강화성당이나 온수리 성당에 견주어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토착' 예배당 건물을 볼 수 있다. 바로 서도(西島)중앙교회다.

주문도

서도중앙교회는 주문도 진촌에 있어서 ' 진촌(鎭村) 교회' 혹은 '주문(注文)교회'로도 불린다. 서도면 면사무소가 있는 주문도는 해발 146미터 되는 봉구산 자락의 진촌, 대빈창(待濱倉), 느리(訥里) 등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주문도에는 조선시대 서해안을 지키던 해상 방어진이 있었고 현감이 다스릴 만큼 국방에 중요한 섬이었다. '진촌'이란 이름이 그렇게 해서 생겨났으며, 군사용 양곡과 무기를 보관하는 큰 창고가 있던 해변 마을에 '대빈창'이 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새로 부임하는 현감이 이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들어왔다 해서 대빈창 (待濱倉)이란 이름이 붙었다.

요즘 주문도로 가는 배는 강화 외포리에서 하루 두 차례, 오전 10시와 오후 3시 경에 출발한다. 차를 실을 수 있는 페리호 한 대가 왕복 운항하는데 볼음도와 아차도를 거쳐 주문도까지 뱃길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오후 배는 주문도에서 밤을 새고 이튿날 새벽 6시경에 출발하기 때문에 여유 있는 여행을 하려면 하룻밤을 섬에서 자야한다.

여름 한철 대빈창 부근에 해수욕장이 개설되어 육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조용한 섬이다. 그래서 이 섬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소박한 멋을 간직하고 있어 온탁해진 도시때를 씻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조용한 섬 주문도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때는 강화 본도에 복음이 들어간 때와 같은 무렵인 1893년이다. 1950년대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 주문구역 진촌교회" 연혁은 교회 역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주문구역 진촌교회 연혁

윤정일

'왕대인'은 강화 성공회 개척 선교사 워너(L . O . Warner, 王蘭道)를, '갈대인'은 당시 강화에 설립된 '조선수사해방학당' 교련 교사로 와 있던 영국 해군 콜웰(Callwell)대위를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주문도에 들른 것이 워너의 전도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해상 검문소가 있던 이 지역을 시찰하려는 콜웰의 군사적 목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영국 성공회 신부와 영국 해군 대위가 통역 겸 안내인으로 윤정일을 데리고 이 섬에 상륙하여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주문도 사람 중에 믿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 뒤 10년만인 1902년 5월, 윤정일이 다시 주문에 들어왔다. 그런 데 이번에는 혼자였으며 성공회 교인이 아닌, 감리교 전도인 신분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들어왔다.

해마다 6월이면 주문도 응개지나루는 만선이 된 고깃배로 성시를 이루었다. 고기를 사고 파는 상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고, 두둑해진 어부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과 술집 색시들로 북적였다. 윤정일은 '죄악이 관영한' 응개지나루터를 전도지로 삼았다. 그가 외친 것은 한마디였다. " 회개하시오. 천국이 가까웠습니다. " 응개지 나루터는 광야였고 그는 세례 요한이었다. 진촌 사람들은 이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김근영

윤정일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여름 한철 전도한 결과 교인 한 사람을 얻었다. 뱃일하던 김근영(金根永)이었다. 그는 수년 전부터 개성을 왕래하며 천주교를 접하고 혼자 신앙생활을 하던 중, 윤정일의 전도를 받고 개종한 것이다. 윤정일이 '유대 광야의 세례 요한'이었더면 김근영은 '갈릴리 바다의 베드로'였다. 그는 믿기로 결심한 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사당을 부숴버렸고, 집안에서 섬기던 신주들을 불태워버렸다... 중략 ...

김근영 홀로 외로운 전도가 주민들 사이에 먹혀들어가기까지는 3년 세월이 걸렸다. 김근영이 1905년 2월 정부로부터 진촌 옛 군영지를 불하받아 영생학교를 건립하고 신식 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 그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친일 어용단체인 일진회가 지방 조직을 확대하면서 주문도에도 들어왔는데 일진회에서 학교 부지를 지부 사무실로 삼으려 음모를 꾸미고 위협하였다. 그럼에도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일진회를 규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이 김근영과 교회를 보는 주민들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박승형 박승태 박두병 박순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