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여행 > 경기 > 강화 > 주문교회 > 박두병, 박순병

박승형, 박승태

진촌의 유력한 양반 집안이던 박씨 문중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밀양 박씨 충헌공파 후손인 박승형(朴承馨)과 박승태(朴承台) 형제가 김근영의 외로운 투쟁에 감동하여 가족을 이끌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박씨 형제가 주문도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 승형 할아버님이 주문도에 들어오신 때와 이유는 잘 모릅니다. 다만 어른들 말씀으로는 승형,승태 할아버님은 본래 경기도 이천에 사셨는데 어떤 사정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어 김포 누산리를 거쳐 강화 본도에 들어오셨다가 다시 어유정도를 거쳐 이곳 주문도까지 오셨다고 합니다. 추측컨대 고향에서 어떤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에 몸을 숨기신 것 같아요. 섬으로 들어오셔서는 배 사업에 손을 대셨고 오래지 않아 많은 재물을 모으셨지요. "

5대째 교회를 지키고 있는 박상인(朴商仁)장로가 들려주는 조상 이야기다. 집안에 전해오는 족보에 나타난 박승형(1837~1912)의 관직은 " 가선동중추추겸오위장" (嘉善同中樞樞兼五衛將)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박승형은 무반출신으로 '종3품' 벼슬인 가선대부와 오위장을 지낸 고위 인사인 셈이다. 정치적으로 혼란하던 철종~고종 시대에 어떠한 연유로든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섬으로 피신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진촌교회 정문.

5대째 교회를 지키고 있는 박상인 장로가 서 있다. 진촌의 유력한 양반 집안인 박씨 문중에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상투를 없애는가 하면 굿하는 집도 없어졌다.

그리고 박승형의 둘째아들 박순병(朴淳秉: 1861~1938)도 지극한 '효행'으로 나라에서 '감역(監役: 조선시대 정부의 건축 공사를 담당하던 종9품 벼슬) 칭호를 받고 주문도의 정부 토지 관리를 맡으면서 이 집안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런 박씨 문중이 교회에 나오게 됨으로 진촌교회 사정이 달라졌다.

" 집안 어른이신 승형 할아버님께서 개종을 결단하시니까 다른 식구들도 두말 없이 따라나왔고 동네 사람들도 눈치를 보며 따라나오기 시작했답니다. 어린 아이들은 무조건 영생학교에 다녀야 했고, 주일이 되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할아버님께 호통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처음엔 동네 사람들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나왔겠죠"

' 영향력 있는 양반 ' 집안의 개종으로 주문도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투를 자른 남자들이 늘어났고 굿하는 집이 사라졌다. 처음엔 억지로 나오던 교인들도 신상의 참 맛을 안 뒤론 열심을 내게 되었다. 그러나 억지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박씨 집안 사람들이 보여준 기독교 신앙의 모습에 감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1917년 5월 ' 기독신보'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박두병, 박순병

경기도 강화군 서도면 쥬문리 교회 권사 박두병씨는 본시 재산이 좀 잇는대 겸하여 쥬를 진실히 밋는고로 범백이 그 동리에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의 칭예를 듯는 터이라. 자기 일가 한 사람이 자기에게 수천원의 빚을 지고 구차하여 갑지 못하고 세샹을 떠나매 그 아들을 불너서 그 빚 갑흘 것을 엇지하려나냐 한즉 그 아들의 말이 일시에 갑흘수는 없스니 돈버는 대로 다만 얼마식이라도 갑겟다 하거는 박씨가 즉시 허락하고 갑흘수ㅜ 잇는대로 갑기를 힘쓰라 하고 도모지 재촉을 하지 아니하였더라. ("박씨의 신앙과 애휼심" , '기독신보', 1917.5.2.)

박승형의 맏아들인 박두병 권사에 관한 이야기다. 내용인즉, 박씨 일가 중에 한 사람이 박두병에게 큰 빚을 갚지 못하고 죽었는데 박두병은 '빚을 승계한' 아들에게 " 갚을 수 있는 대로 갚으라. " 며 빚 독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때 진 빚이 2천원 가량 되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1억원에 해당하는 상당한 액수였다. 가난밖에 물려받은 것이 없는 아들은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 돈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7년 음력 정월초에 아들은 교회 목사와 박두병, 박순병 형제를 비롯한 박씨 문중 교인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간단한 기도회가 끝나고 아들이 입을 열었다.

" 여러 어르신, 제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빚을 갚으려고 그 동안 힘껏 노렸했지만 8년동안 16원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으로라면 제가 죽기 전에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뿐더러 빚 때문에 제 맘이 늘 편치않으니 어찌하며 좋겠습니까? 집안 여러 어르신들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

채권자도 채무자도 긴 침묵에 들어갔다. 한참 뒤 그 자리에 이던 목사가 침묵을 깼다. 강화 본도 홍의교회 출신 종순일(種純一) 목사였다. 바로 20년 전 비슷한 상황에서 자기에게 돈 빌려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빚 문서를 불태운 장본인이었다. 종순일 목사는 그때 그런 행동을 하도록 자극한 마태복음 18:20 이하 말씀을 박씨 형제들에게 읽어준 뒤, " 두세 사람이라도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 과 " 1만 달란트 빚 탕감받은 사람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않아서 받은 징벌"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동생 박순병이 그 침묵을 깼다. 그도 받을 돈이 60원 있었다.

순병씨가 그 형님을 대하야 말하기를 오날날 이 자리에서 이 문제 난 것이 도시 하나님의 뜻인 듯 하니 형님이 그 돈을 아니 밧을지라도 당장 곤난을 당할터이 아니오니 탕감하야 주셔 밧아야하겟다 하는 마암과 갑하야 하겟다 하는 금심이 서로 잇셔 기도하는 때에 항상 거리낌이 업게 하면 하나님께셔 더욱 아람답게 여기시겟다 하매 박씨가 즉시 즐거온 마암으로 쾌히 허락하야 2천여원을 밧지 아니하겟다 하매 이 아오 순병씨도 밧을 것 잇는 60여 원을 탕감하며 내 형님은 수천원도 탕감하엿거던 하물며 몃 푼 아니되는 내 것을 밧겟느냐 하고 밧지 아니하기를 성언하매 채무자의 깃버함은 물론이어니와 좌중의 여러 교우들의 깃버하며 찬성함은 과연 한 입으로 다 말하기 어려웠더라. (" 박씨의 신앙과 애휼심", '기독신보' 1917. 5.2. ) 참고: 강화 기독교역사 연구 PDF 파일

"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전 1: 9)는 성경 말씀처럼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그래서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20년 전 홍의 마을에서 있은 '빚 탕감 잔치'가 이제 주문도에서 재연되었다. 20년 전 빚 잔치의 주역이던 종순일은 이제 목사가 되어 주문도에서 빚 잔치의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20년 전 종순일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두병, 박순병 형제는 탕감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다.

주문도가 기독교 섬으로 바뀐 데는 이 같은 '있는 교인들'의 너그러운 베풂과 사랑의 나눔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교회 설립 10년 만인 1912년 당시 주문도 전체 가구 181호 중에 136호가 교회에 등록하였으니 주민의 75%가 교인이 되었다는 계산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주문도에는 진촌에 91가구, 대빈창과 느리에 60가구, 모두 150여 가구가 있는데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가구는 두 마을 합쳐 10가구 미만이다. 섬 전체가 복음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면 소재지인 이 섬에는 술집이 없다. 술집뿐 아니라 그 흔한 노래방도 없고 다방 하나 없다.

주문도 교회 이야기    진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