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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 전투와 다자이후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뒤 왜는 백제에 구원군을 파병한다. 663년 지금의 금강인 백촌강(白村江)에서 백제, 왜와 나·당 연합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백촌강 전투는 왜의 참담한 패배로 끝난다. 400여척의 전함이 불 타고 2만7000여명의 구원군도 모두 전사한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도 사실상을 막을 내리게 된다.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당시 일본에게도 위협적인 일이었다. 나·당 연합군의 협공을 두려워 한 일본은 국가체제의 정비에 나서는 한편 규슈(九州)지역에 성을 새로 축조하는 등 대비에 나선다. 이 시기에 백제의 유민들도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후쿠오카(福岡)현의 다자이후(太宰府)는 그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자 백제 유민들의 한과 혼이 어린 역사의 현장이다.

다자이후부는 백제와 왜군이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한 뒤 일본 정부가 설치한 지방 관청이다. 이 시기부터 8-12세기의 나라(奈良), 헤이안(平安)시대에까지 규슈지역을 다스리고 일본 서부지역의 방위와 한·중 교섭의 창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다자이후에는 현재까지 그 다양한 역사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 있다. 1300년 역사를 지닌 고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대사의 생생한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고대 한·일 교류의 흔적과 함께 백제의 영향을 받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다자이후는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도의 기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취재진이 다자이후를 방문한 때는 토요일. 수 많은 관광객들이 고도 순례에 나서고 있었다. 백제 고도인 공주, 부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광객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이처럼 다자이후에 매료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자이후는 역사도시로서의 유적이 매우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시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문화 관광지이다.

백제식 산성 오오노성

다자이후의 유적 가운데 백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오노조(大野城)이다. 오노조는 다자이후를 방어하기 위해 백촌강 전투 2년 후인 665년에 축조됐다. 다자이후 관청의 북쪽에 있는 시오지산(四王寺山) 산정에 있다. 당시 이 성의 축조는 3명의 백제 고위 귀족이 맡았던 것으로 일본 역사학계는 전하고 있다. 당연히 백제의 산성을 모방해 지어졌다. 토루와 석단으로 산봉우리 사이를 연결한 약 8km의 산성으로 그 안에는 약 70동의 창고 초석이 남아 있다. 유사시에 성 안에 머물며 외침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든 성이다.

시오지산 정상에서 바라본 다자이후의 모습은 공주와 부여의 고도와 흡사하다.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고 시가지를 미카사강(御笠川)이 통과한다. 산의 정상부를 드루고 있는 산성도 부소산성과 공산성의 형태와도 유사하다. 정상에서 각 방향을 조망할 수 있다.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나·당 연합군의 공격이 대비하기 위해 만든 산성이라는 설명에도 납득이 간다. 산성 곳곳에는 아직도 토루와 석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성 전체를 돌아보기 위해 택시를 임대했는데 일본인 택시 기사는 굳이 주문하지 않았는데 택시를 이리저리 몰며 산성의 흔적들을 찾아내 보여준다. 이 택시 기사는 “한국의 백촌강 전투에 다자이후의 역사가 시작됐다”며 “이 산성은 백제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산성 안에는 창고 터의 주춧돌이 13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지난 역사의 흔적을 웅변하고 있다. 직사각형의 창고 터는 모두 24개의 주춧돌이 박혀 있다.

다자이후에는 이 성 외에도 기이조(基肄城)와 미즈키(水城)도 있다. 역시 백제 멸망 이후에 다자이후의 방어를 위해 축조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즈키이다. 오노조보다 1년 앞서 축조된 미즈키는 평야의 출입구를 거대한 제방으로 막고 그 앞쪽에 호를 파서 물을 저장한, 말그대로 수성이다. 수성의 규모는 높이가 14m, 기저부 폭 80m, 길이 1.2km이고 인공 호수는 깊이 4m, 폭이 80m이다. 산성을 축조하는 것도 모자라 수성까지 축조할 만큼, 철저한 방어에 나섰던 고대 일본인들과 백제 유민들의 땀을 배인 곳이다. 수성 옆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수성의 모습은 숲으로 우거져 있어도 그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다자이후부의 중심부에는 관청이 있던 터가 보존돼 있다. 당시의 역사를 알려주는 초석(礎石), 회랑 등이 그 주변의 유적 등과 함께 복원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이 관청 터의 초석에는 한국의 영향을 알려주는 흔적이 있어 눈길을 끈다. 초석 표면의 동그란 홈이 있는데 이 홈은 경주 감은사 동탑의 기단석에도 같은 모양이 있다. 단단하고 뾰족한 돌로 갈면서 복을 빌 때 생기는 홈으로 한국인들의 민속신앙이 전래된 것이라는 게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또 이 터에서는 고대 백제 등으로부터 건너온 도자기 등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당시 활발했던 한·일 교류를 입증하는 대목이다.

다자이후에는 수 많은 불교문화의 유적과 유물 등이 있다. 간제온지(觀世音寺) 나라시대에 건립된 천태종 사탈이다. 746년 텐지 천황이 규슈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서일본 최대의 사찰인 간제온지는 그 웅장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강당(講堂)과 금당(金堂) 등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당시 나라시대의 사찰들이 대부분 백제 건축기술자들에 의해 건축됐음을 감안할 때 이 사찰의 어딘가에도 백제인의 혼과 손길이 묻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기술로 만들어진 와당과 기와는 연화문으로 백제의 것과 같다. 간제온지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와 함께 다자이후에는 가마쿠라시대에 창건된 고묘젠지(光明禪寺)와 나라시대 쇼뮤천황이 세운 고쿠분지(國分寺) 유적, 승려가 계율을 수여받는 곳인 가이단인(戒壇院) 등의 불교 유적들이 천년 고도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다자이후는 일본 내의 다른 백제 유적과는 달리 백제 멸망 후의 역사를 보여주고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곳이다. 또 당시 대거 일본으로 망명했던 백제 유민들의 혼과 숨결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1300여년 전에 망국의 한을 품고 후쿠오카의 한적한 고장으로 흘러 들어와 또 다시 있을 지도 모를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했을 백제 유민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출처: 대전일보 (2009.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