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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카라시마

백제 25대 무령왕 탄생설화의 섬

아주 오래 전부터 섬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이 있었다. 그 옛날 풍랑에 떠밀려 이방인들의 배가 정박했고 해안의 동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훗날 왕이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섬을 ‘임금의 섬’이라고 불렀다. 막연히 전설이라고 여기고 있던 섬사람들에게 깜짝 놀라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전설은 단지 전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였다. 일본 사가(佐賀)현 가라쓰(唐津)시의 작은 섬, 가카라시마(加唐島). 바로 백제 무령왕(武寧王) 탄생지다. 이 곳의 섬사람들은 전설이 실존하는 역사로 부활하는 경이로움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이가와 유카(井川 由架·44)씨도 그 섬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그 전설을 수도 없이 들었다. 후에 그 전설이 역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묵직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역사의 인연은 질기다. 그는 지난 7월부터 백제문화제 일본 홍보대사로 위촉돼 활동하고 있다.

무령왕의 탄생 비화를 품고 있는 가카라시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이다. 사가현 히가시마쓰우라반도(東松浦半島)의 최북단 3.5km 앞바다, 거친 바닷바람과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여유롭게 떠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마치 어떤 동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인영(人影)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섬은 평지가 별로 없고 자체가 하나의 산이다. 푸른 수풀과 나무들이 바람을 맞아 쉴새없이 몸을 흔들어 댄다. 봄에는 동백나무이 향연이 펼쳐진다. 약 2만그루의 동백이 자생하고 있다. 사계절마다 무궁화와 털머위, 애기원추리 등이 꽃망울을 터트린다.

가카라시마 현지 취재에는 이가와 유카씨가 동행했다. 구마모토현 공무원의 소개로 전화를 했더니 만사를 제치고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숙소가 있는 후쿠오카(福岡)시에서 기차를 타고 가라츠시에 도착하니 미리 마중 나와 있다. 후쿠오카에서 학생들에게 고토(가야금과 비슷한 13현의 일본 전통현악기)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대전일보 취재진의 가이드를 위해 기꺼이 하루의 시간을 내주었다. 첫 만남에서도 백제에 대한 그의 경의와 깊은 애정을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가라츠시에서 뱃길로 15분을 달렸을까. 시야에 잡히는 가카라시마는 한국의 여느 섬과 다름이 없다. 하늘 위에선 ‘임금의 섬’을 호위하듯 매들이 길게 원을 그리면 반긴다. 가카라시마에서 배를 타고 서북쪽으로 2시간여를 가면 쓰시마(對馬島)다. 그 너머가 부산항이 있는 한국의 남해다. 일본 땅에선 가까운 곳이지만 한국에서의 뱃길로는 머나먼 이 곳에서 무령왕은 태어났다.

익히 알려진대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무령왕의 탄생기가 등장한다. 웅략(雄略) 천황 5년에 개로왕(蓋鹵王)은 동생 곤지(昆支)를 일본에 파견한다. 이 때 곤지는 개로왕의 임신 중이었던 개로왕의 부인과 동행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개로왕은 곤지의 원을 들어 출산이 임박했던 그의 아내를 동행시키면서 출산하면 모자를 함께 귀국시키도록 명한다. 항해 도중에 임신한 개로왕이 부인이 산기를 느끼자 일행은 츠쿠시(筑紫) 가쿠라세마(各羅嶋(島), 현 가카라시마)에 도착해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왕자는 세마키시(嶋王, 섬왕), 즉 사마왕(斯麻王)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가카라시마는 니리무세마(主嶋)로도 불렸는데 임금의 섬이라는 뜻이다.

전설의 섬이 역사적 현장으로 평가되는 극적인 사건이 1971년에 있었다.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무덤의 주인공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종종 역사 왜곡을 의심받고 있는 일본서기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가카라시마에서의 무령왕 탄생을 보다 극명하게 뒷받침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무령왕을 ‘왕의 휘(諱)는 사마(斯摩)’라고 전하고 있다. 이가와 유카씨는 “어려서부터 가카라시마에서 고대 한국의 왕이 탄생했다는 말을 어른들에게 듣었지만 단지 전설인 줄로만 알았다”며 “그런데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사실로 밝혀져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오비야우라
▲ 무령왕이 출생한 곳으로 전해 내려오는 가카라시마 포구의 동굴. 현지 주민들은 ‘오비야우라’라고 부른다.

가카라시마에는 일본서기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기록과 흔적은 없을까. 궁금증을 안고 섬에 내리자 무령왕교류가라쓰시실행위원회의 임원 일행이 나와 있다. 이들은 가카라시마가 고향으로 어업으로 터전을 꾸리고 있다. 가카라시마 주민들은 무령왕릉 발굴 이후, 한국과의 교류를 터왔다. 이후 2000년에 설립된 게 무령왕교류실행위원회다. 그 때 가카라시마시마왕회((加唐島斯麻王會)도 발족됐다. 이 두 단체를 중심으로 그동안 한·일 국제심포지엄이 개최됐고 공주, 부여의 백제문화제와 가카라시마 무령왕 탄생축제간 교류, 초등학생의 홈스테이 상호 파견 등이 이뤄져 왔다.

일행은 취재진을 섬의 맨 끝자락으로 먼저 안내했다. 바로 쓰시마가 보이는 섬의 최북단, ‘에누오노하나’이다. 에누오는 옛부터 내려오는 지명(地名)이고 하나의 코(鼻)라는 뜻이다. 에누오의 코라는 뜻으로, 섬에서 뽀족하게 돌출돼 있어 코처럼 보인다. 맑은 날에는 이 곳에서 가카라시마로부터 배로 10여분 거리인 이끼(壹岐)섬과 쓰시마까지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쓰시마는 보이지 않고 이끼섬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섬의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니, 바다가 유독 넓어 보였다. 1300여년 전에 저 바다를 건너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왔으리라.

차를 돌려 나오는 길 주변으로는 동백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채로운 광경이 연출된다. 한 마리의 크고 흰 새가 길을 인도하듯 차 앞에서 앞서 날아가고 있다. 5분여를 그렇게 날아가던 새를 바라보던 한 일행이 “가카라시마에 오래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신기하다”고 말한다. 섬의 남쪽으로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서 있다. 이 곳 사람들은 로기관음(櫓木觀音)이라고 부른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이 염주를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저 바위는 무령왕이 태어났을 때에도 저 자세로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무령왕릉이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는 동굴은 동굴이라기보다는 산 아래의 바위 밑 움푹 들어간 모양이다. ‘오비야우라’라고 불리는 동굴은 바위 아래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다. 예전에는 동굴이 훨씬 깊었는데 풍화작용으로 깎였기 때문이라고 이가와 유카씨가 설명한다. 바닥은 자갈이 깔려 있다. 거친 항해 끝에 겨우 이 거친 곳에서 고단한 몸을 풀고 왕자를 출산했을 백제 왕비의 고초를 생각하게 된다. 동굴 안에는 ‘백제 제25대 무령왕 탄생지’라는 나무판이 초라하게 서 있다. 이 곳에서도 신기한 일이 있었다. 바닷가에 한국 소주병이 떠밀려 와 있는 게 눈에 띠었다. 현지 주민은 조류를 타고 한국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주병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건들이 이 곳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곤지왕 일행의 배가 가카라시마로 오게 된 이유를 알 것 같다. 고대로부터 가라쓰는 한국, 중국과 교역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동굴 옆으로는 무령왕이 태어나자마자 목욕물로 사용했다는 우물도 있다. 그 옆으로는 무령왕의 관에 사용된 ‘고야마키(高野)’ 몇 그루가 심어져 있다. 일본이 원산지인 고야마키는 한국에서는 금송(金松)으로 불리는 나무다. 다시 어항으로 나오는 길에는 무령왕 탄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공주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와 공주향토문화연구회, 무령왕교류가라쓰시실행위원회, 가카라시마사마왕회 등이 함께 기금을 모아 지난 2006년 6월 건립했다.

가카라시마에는 긴 세월 속에서도 무령왕의 흔적이 묻어난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서기 등에만 등장하는 무령왕 탄생의 또 다른 기록이나 증거를 찾기 위한 탐사 취재였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무령왕의 탄생 설화는 일본의 조작이라는 주장도 없지 않다. 무령왕이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난 이후,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행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일부 학자는 일본에서 머물렀다는 주장도 편다. 그 수 많은 수수께끼의 역사를 품고 묵묵히 지난 세월과 맞서고 있는 가카라시마는 그 진실을 알까. 출처: 대전일보 (2009.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