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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여행기

지인으로부터 여행을 가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고보니 2년동안 여행다운 여행을 해 보지 못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부여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부여를 선택한 이유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일본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백제는 위례성(서울)에서 웅진(공주)을 거쳐 성왕때인 538년에 세번째로 사비(부여)에 도읍을 정했는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기 까지 120여년간 마지막 수도 였다. 일본유학을 계기로 우리역사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특히 한일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친 백제에 대해서 관심이 높아져 공주와 부여는 꼭 가보고 싶었다.

부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몇 해 전에 일본친구로부터 책을 선물받았다. 시바료타로라는 일본의 인기작가가 쓴 한국기행문 '韓のくに紀行'라는 책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의 기성세대들이 한국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부여를 선택했다.

서울에서 부여에 가는 방법은 동서울터미널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되는데 동서울터미널은 하루 8회 밖에 없지만 남부터미널은 30분 간격으로 부여고속직행이 출발하며 2시간이면 부여에 도착한다. 사이사이에 천안과 공주 등을 경유하는 완행이 있는데 부여까지 3시간 30분이나 걸리므로 부여직행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매표원에게 부여직행인지 확인하고 지인과 함께 11시에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목요일 오전이라 승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인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에 정안환승휴게소를 지나고 (12:20) 남공주 톨게이트를 나오자 (12:30) 무녕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여서 이곳이 백제의 땅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부여의 외곽인 백제문화단지를 지나면서 (12:50) 부여를 흐르는 금강(백마강)의 모습이 들어오는데, 강을 옆으로 하고 이어지는 낮은 구릉지대의 풍경이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막연하지만 예전에 일본여행을 할 때 전철을 타고 히로시마를 지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는 2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정확히 2시간 만에 부여터미널에 도착했다. 일본의 경우 고속버스를 타면 보통은 한 시간에 한 번씩은 고속도로휴게소에 들른다. 우리나라 버스기사들은 일본에 비해 과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부여터미널에서 길을 물어 10분 걸어서 부소산성입구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찾아갔다. 관광안내원의 말을 정리하면 부여관광의 중심은 정림사지5층석탑이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림사지5층 석탑을 중심으로 부소산성, 궁남지, 부여박물관, 터미널, 번화가가 있는 것이다. 우선 정림사지5층석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사또국밥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사또국밥은 부여에서는 꽤 알려진 가게인듯 손님들이 많이 있었다. 국밥을 주문했는데 가격이 8천원이었다. 부여가 지방도시임을 감안할 때 부담스러울 수 있는 가격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밥은 국물이 빨갛고 고기와 달걀이 들어 있어서 육개장과 국밥을 섞은 듯한 느낌이었다.

정림사지5층석탑

사또국밥에서 나와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을 보기위해 가던 중에 자연스럽게 정림사지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장료 1500원). 기념품가게에 들렀더니 백제와 관련된 책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백제의 의복과 장신구' , '백제 멸망의 진실' , '백제의 무덤 이야기' , '일본에 살아 있는 백제문화' 등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몇 권 있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읽어보려고 한 권을 샀다.

박물관에서 나오자 넓은 들판에 서 있는 정림사지5층석탑이 보였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으로 국보 제9호로 높이 8.33미터이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신라 장군 김유신의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을 중국으로 끌고 가면서 정림사지5층석탑 1층 탑신에 백제를 멸망시킨 자신의 공적을 적어넣었는데, 이 때문에 한 때 이 탑이 소정방이 세운 것으로 오해 했었고, 탑의 이름 또한 백제를 평정했다는 뜻의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었다. ※ 정림사지5층석탑 더 보기.

부여박물관과 백제금동대향로

정림사지에서 10분정도 걸어 부여박물관에 도착했다. 부여박물관 안은 새롭게 단장한듯 내부가 매우 깨끗했다. 제2전시실은 '사비백제와 백제금동대향로'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 진품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부여는 역사적 스토리는 많지만 남아 있는 유물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부여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의 의미는 크다.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백제왕릉원 옆에 있는 능산리 절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조명을 받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다가가 실물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래에서는 용이 받치고 있고 꼭대기에는 봉황이 앉아 있는데 가운데 부분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말 탄 사람, 물고기 등이 조각되어 있고 악어도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정교한 물건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품이 최근에 발견됐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부여박물관은 매우 월요일은 휴관한다.

백제인물상

부여박물관의 유물 중에 백제인물상이 있었다. 흙으로 구워서 만든것 같은데 1981년 정림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머리 장식모양이 일본역사에 나오는 인물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대의 복식문화에 있어서 일본과 가장 관련이 있는 것은 아무래도 백제인듯하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여박물관의 백제인물상은 구체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것 같다.

궁남지

부여박물관을 나와 5분정도 걸어서 궁남지(宮南池)에 도착했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으로 알려져 있다. 넓은 연밭 가운데에 만들어진 연못인데 주위는 버드나무가 심겨져있다.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고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포룡정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서동요설화에서 따 온듯하다. 서동요설화에 무왕의 어머니가 연못의 용과 통교해서 낳은 것이 서동 즉 무왕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때가 겨울이라 호수와 정자만 볼 수 밖에 없지만 연밭이 너무 넓어서 연꽃이 피는 7,8월이면 놀라운 풍경이 만들어 질 것 같다. 매년 여름에 부여서동연꽃축제 가 열리는데 이 때에 한번 다시 오고 싶다.

백제관

궁남지를 산책하고 있는데 백제관 관리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백제관은 부여한옥생활체험관으로 민칠식가옥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네 명의 왕비를 배출한 여흥 민씨 집안의 집으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옥이다. 부여군에서 매입하여 한옥체험관으로 운영하는데 여행오기전에 급하게 예약을 하게 되었다. 부여 지리를 잘 모를테니 관리인이 친절하게도 궁남지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백제관에 도착하자 관리인의 간단한 가옥 소개가 있었는데 성의가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다. 안사랑이라는 행랑채를 빌렸는데 숙박비는 6만원이었다. 역시 한옥은 운치가 있어서 좋으나 화장실과 욕실이 떨어져 있어서 조금은 불편했다. 여름이라면 이런 불편이 별것 아니겠지만 추운 겨울에 화장실과 씻는 것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하지만 날씨만 따뜻하다면 가족과 함께 추억 만들기에는 딱 좋은 집이었다.

백제관에 짐을 풀고 부여중심지까지 30여분을 걸어서 나왔다. 부여군청사거리 로터리에는 말 탄 장군의 동상이 멋지게 서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계백장군의 동상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했다. 중심지인 터미널 주변의 작은 번화가를 맛집을 찾아 헤매다가 굴사랑이라는 가게에 들어갔다. 굴전과 굴밥을 시켜서 지인과 막걸리를 마셨는데 주인아저씨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부여사람들은 발음이 부정확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절반은 못 알아듣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백제관 관리인도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웠었는데 지인도 나랑 같이 생각하고 있었는지 맞장구를 쳐 주었다.

굴사랑에서 나와 어두운 밤길을 궁남지를 지나서 백제관으로 향했다. 궁남지는 밤에도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연못과 포룡정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궁남지 옆을 지날 때 조명을 받아 햐얀 탑이 멀지만 크게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신라와 백제간의 황산벌전투를 기리는 백제오천결사대 충혼탑 이었다. 한 겨울 밤길을 한 시간정도 걸었더니 술이 벌써 다 깨어서 백제관 앞 삼거리에 있는 가게를 지날 때 술을 한 병 더 샀다. 백제관에 돌아오니 다른 투숙객은 없는듯 조용했다.

백제왕릉원 (능산리고분)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사 온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9시 20분에 백제관을 나섰다. 다음 여행지는 부여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백제왕릉원(능산리고분군)이다. 부여관광리플렛을 보고 걸어서 한시간 정도면 도착하리라는 생각에 산책할 겸 길을 나섰는데 관광지도가 실측지도가 아닌 개념도 인 탓에 길을 잃기도 했다. 백제왕릉원에 도착할 즈음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백제왕릉원 입구를 지나 능산리고분군전시관을 관람하면서 비를 피했다. 백제왕릉원은 전시관 뒤쪽 경사면에 7기의 왕릉이 모여 있어 능산리고분군이라고도 불린다. 왕릉원으로 가는 길 왼쪽에는 의자왕의 가묘가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후 의자왕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 의하여 백제백성 1만2천명과 함께 당의 낙양으로 압송되어 다음해에 병사하여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고, 아들 부여융(扶餘隆)은 당의 신하로 웅진도독을 지내다 682년 북망산에 묻혔는데 중국 낙양 북망산에 있는 의자왕의 묘는 개발로 인해 위치를 알 수 없어 그곳의 흙을 가져와 백제왕릉원에 가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백제왕릉원(무료입장)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1917년, 1936년에 일본학자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는데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1993년 왕릉원 바로 옆에 있는 나성과 고분군 사이에서 주차장을 건설하던 중에 절터가 발견되었고 여기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발굴조사에서 부장품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에 숨겨져 있으리라고 본다.

부소산성

능산리고분군전시관 직원에게 왕릉원 앞을 지나가는 버스의 간격을 물어봤더니 20~30분에 한 대씩 온다고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빈 택시가 지나가길래 손을 들어서 잡았다. 다음 여행지인 부소산성 까지는 택시로 10분정도 걸렸는데, 마침 택시기사는 서울에 살다가 부여로 이사온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부여사람들이 발음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처음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아울러 서울말 쓰는 것을 여자들은 좋아하는데 남자들은 재수없어한다는 경험도 얘기도 해 주었다. 이런 경향은 지방사람들의 공통적인 성향인것 같다.

삼충사

부소산성(扶蘇山城) 입구인 부소산문 에 도착하여 2천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먼저 삼충사로 향했다. 부소산성은 「백제본기」,「삼국사기」 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삼충사(扶餘 三忠祠)는 백제의 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세운 사당으로 사당안에는 세 사람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삼충사는 용마루 양 끝에 치미(망새)장식4)으로 건축되어 있다. 이는 부소산 절터(서복사지)에서 출토된 것을 복제하여 장식하였는데, 진품은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삼충사는 1957년 지었다가 1981년에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일제시대에 일본이 부여에 세우다가 패전으로 완성하지 못한 부여신궁(扶餘神宮)의 자리가 지금의 삼충사 자리이다. 일본의 신사 중에서도 격이 높은 것을 신궁이라고 하는데 서울의 조선신궁에이어 부여에 신궁을 지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부여(백제)에대한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사실이다.

낙화암 (백화정)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여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기록이 전하며 후세 사람들이 낙화암(落花岩)이라 불러 백제여성의 절개와 고귀한 충렬의 표본이 되고 있다. 암벽은 60m 정도이며 절벽 아래에는 송시열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이 빨간 글씨로 크게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낙화암 밑을 흐르는 백마강을 굽어보며 서 있는 육각형의 백화정은 백제 패망의 한을 품고 죽어간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당시 이곳 군수 홍한표(洪漢杓)의 발의로 건립되었다. 여기서 일제시대의 군수의 지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1913년 기준으로 조선의 행정구역은 13도 12부 220군이었다. 일제시대에 군수의 지위라는 것은 일본이 식민지조선을 지배하는데 적극 협력한 220명 중 한 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부여군수 홍한표가 관료부문에 수록되어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한표는 1913년 3월 충청남도 정산군 서기로 근무했다. 1914년부터 충남 청양군 서기로 재직하다가 1923년부터 구여군 속을 지냈다. 1927년 7월 고등관 8등의 군수로 승진해 청양군수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달 부여군수로 옮겨 1929년 12월까지 재직했다. 1928년 11월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무량사

부소산성의 정상인 낙화암에서 내려와 다음 목적지인 무량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부여터미널로 향했다. 무량사는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데 보령에서 가깝다. 터미널에서 물어보니 외산 가는 버스가 1시 45분에 있었는데 다음 버스는 5시에나 있다는 말을 들어 안심했다. 미리 표를 사 놓고 터미널 근처에서 식당을 찾다가 부여가이드북에서 본 아우네순대국밥이 있길래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부여에 온 후로 국밥만 먹었다. 부여는 연입밥으로 유명한듯한데 먹지 못하고 떠나려니 조금 아쉽다.

보령행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가니 외산터미널에 도착했다. 외산터미널은 말이 터미널이지 버스정류소와 다를 바 없었다. 터미널에서 무량사까지는 걸어서 약 25분정도 더 가야하는데 무량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면 바로 무량사 입구이다.(입장료 2천원)

무량사는 세조가 문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 중 하나인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것으로 알려진 절이다. 부여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백제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조선시대 인물인 김시습의 영정(보물 1497호)이 보관되어 있어서 백제관광 일색인 부여여행이 좀 더 다채로워질 것 같아 이곳에 오게 되었다. 무량사에는 김시습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정각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김시습의 초상을 보니 마치 내가 역사적 현장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무량사의 극락전을 뒤로하고 되돌아올 때 쯤부터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외산터미널에 가까워지자 모텔과 술집 간판이 보였는데 왠지 시골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외산터미널은 터미널옆에 있는 가게에서 매표소도 겸하고 있었다. 보령에서 가까우므로 보령행 버스가 많으려니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눈이 비로 바뀐 탓에 농협에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보령행 완행버스를 타고 구 대천역에서 내렸다. 버스를 환승하여 보령터미널에 도착했고 보령터미널에서 인천행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은산 별신제

처음으로 부여를 여행하면서 1박2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어에서는 백제를 '쿠다라'라고 읽는데 그 어원이 부여에 있는 구드레나루터에서 기인했다는 설이 있다. 다음에 다시 부여에 간다면 구드레나루터에도 가 보고 싶다. 부소산성 낙화암 아래에는 백마강 유람선이 있고, 고란사라는 절도 있었다. 부여군 은산면에서는 3년에 한번씩 음력 2월 하순에 은산별신제가 열리는데 백제부흥군을 이끌다 무산되어 죽은 귀실복신(鬼室福信: ? ~663년)이 은산별신제의 장군신이라고 한다. 다음에 부여에 올 때는 궁남지에 연꽃이 활짝 피었을 때 오고 싶고 공주에도 들러 보고 싶다.

작성: 2015.2.10